차이나 오디세이

도자기 도시 경덕진(景德鎭; 징더쩐)

라오짱(老張) 2024. 9. 2. 10:10

대륙의 밤을 가로질러

봄비가 나흘째 오락가락하고 있다. 주말을 고 벼르던 쟝시성(江西省) 징더쩐(景德镇)으로의 출행을 감행하려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어 집을 나섰다. 집 앞 정원의 자목련은 짓궂은 봄비와 꽃샘바람에도 가지마다 화사하게 만개한 꽃가지를 잘 간수하고 있다.

 

이번 출행의 개략적인 일정을 오후 늦게 상하이를 출발해서 자정 이전에 징더에 도착, 호텔에서 일박, 그다음 날 박물관 관람 등 도자기 관련 탐방, 오후 7시 전후에 징더을 출발해서 상하이로 귀환하는 것으로 잡았다.

 

홍챠오(虹桥) 기차역은 오늘도 예전처럼 인파로 넘쳐나지만 코로나19 음성확인 철차가 없어져서 역사 안 진입과 탑승 절차가 한결 수월해졌다.

 

시일이 촉박해서 출행을 결정하고 숙소와 기차표를 예약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우선 목적지인 징더의 가성비 좋은 호텔을 물색해서 외국인 투숙 가능여부를 확인하고 인터넷 예약을 마쳤다. 어떤 기준으로 외국인이 투숙할 수 있는 호텔을 정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렴하고 위치도 둘러볼 곳과 멀지 않아서 예약한 호텔은 어떨지 궁금하다.

 

문제는 기차표 예약이었다. 기차표 예매 어플인 '취날(去哪儿)'과 '티에루(铁路) 12306'을 통해 예매를 시도했는데 직행 편은 시간이 맞지 않을뿐더러 유사한 일정의 표는 매진된 상태다. 우회하거나 환승하는 방법을 찾아서 "징더(景德镇)-지우장(九江)-항저우(杭州)-상하이" 루트의 돌아오는 기차표를 확보했다.

 

방금 쟈싱시(嘉兴市) 경계로 진입한 이 열차는 17:44에 상하이를 출발해서 징더을 경유하여 지우장까지 가는 고속열차다. 상하이-지우장 구간 표는 남아 있는데, 그 중간에 거쳐가는 징더까지 표가 매진 상태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50위안을 더 지불하고 징더에서 하차할 요량으로 예매를 했었다. 한정된 수의 좌석을 볼모로 인민의 호주머니를 털어내는 중국 철도의 경영전략은 가히 천민자본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해서 씁쓸하다.

빈 좌석 없이 만원인 열차가 예정된 시각에 어김없이 출발했다. 앞뒤 좌석의 남성 승객이 누군과와 나누는 전화 통화 소는 소란하고 길게 이어진다. "옆 좌석 승객에게 불편을 주는 통화는 삼가고 전화는 객실 밖에서 해주세요"처럼 우리나라 고속열차에서 들을 수 있는 안내 방송은 들을 수 없다. 공공예절 수준의 차이를 확연히 느끼는 부분이다.

 

쟈싱과 항저우에서 한 번씩 정차한 고속열차는 '세계 잡화의 수도'로 알려진 이우(義烏), '금성과 직녀성(婺女) 두 별이 화려함을 다투는 곳'에 위치한다는 진화(金华), 저장 안후이 후베이 쟝시 네 성(省)에 인접하여 '사성통구(四省通衢)'로 불리는 취저우(衢州), 위샨(玉山) 등을 거치며 승객들을 태우거나 내려주며 서남쪽 목적지를 향해 어둠 속을 질주한다.

 

부유하고 풍요롭다는 도시 상라오(上饶)에 도착한 열차는 좌석 방향을 거꾸로 돌리고 빈자리를 채운 후 한참만에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우위엔(婺源)을 거쳐 예정된 시각에 징더 북역에 도착했다.

 

하차 후 역사를 막힘없이 빠져나오니 직통으로 연결된 택시 승강장은 지척인, 잠시잠깐만에 내 뒤로 줄이 장사진처럼 길게 늘어섰다. 택시가 들어오는 통로에는 차를 세워둔 채 기사들이 승객들 가까이로 와서 무어라고 큰 소리를 치며 같은 방향의 합승객을 찾는다.

 

한참만에 내가 예약해 둔 호텔 방향으로 간다는 기사의 택시에 올랐다. 뒷좌석 승객은 택시에 오른 지 10분째 기다린다고 하는데, 기사는 남녀 동료 승객 둘을 더 데리고 와서야 출발을 했다. 시내 후미진 곳을 헤집으며 합승객들을 두 곳에 내려주고 호텔에 도착하니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킨다.

 

체크인을 한 후에 호텔 주변을 한 바퀴 돌고 호텔로 다시 돌아왔다. 좁은 도로와 오래된 주택과 상가 등이 어우러진 호텔 주변은 주민들이 송도 등 신도시로 빠져나가고 썰렁해진 인천의 구도심과 유사해 보였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짧지도 않았던 하루 여정을 맺고 달콤한 꿈을 청해 본다.

 

도자기 도시 속으로

일곱 시 반경 호텔을 나섰다. 여느 다른 도시의 주말 모습답지 않게 길거리에는 자동차, 오토바이, 행인 등으로 분주하다. 가까이에 있는 어요창(御窑廠) 유적지 공원부터 둘러볼 요량인데 거쳐가는 길 지척에 있는 인민광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주산대도(珠山大道) 도로변 청화백자 기둥의 가로등과 광장과 접해 있는 너른 보행로의 도자기를 빚거나 운반하는 도공들의 조상(雕像) 등이 도자기 도시의 중심이 와 있음을 실감케 해 준다. 거리에서 계단을 따라 사방이 수목으로 조성된 화단에 둘러싸인 석재 바닥의 광장으로 내려섰다.

 

여기저기 음악에 맞춰 광장무나 커플 댄스를 추거나, 배드민턴 등 가벼운 운동을 하거나, 굽은 허리에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정겹게 얘기를 주고받는 등 많은 사람들이 주말 이른 아침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들 대부분은 족히 일흔이나 여든은 되어 보이는 노인들이 대다수다.

 

광장을 둘러싼 정원 한편에는 더러 꽃봉오리를 땅에 떨군 동백 고목이 가지마다 붉은 꽃봉오리로 한껏 치장하고 있다. 마치 노인들의 천국처럼  보이는 이 공원의 저 노파들도 찬란한 봄이 다 지나가기 전까지 저 동백처럼 아름다운 꽃봉오리를 마음속에 한 송이씩 품고 있을 것이다.

차도 옆에 자전거 등 이륜차 도로가 있는 다른 도시들과 달리 너른 인도로 이륜차가 통행하는 점이 특이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답게 큰 도로의 곁가지로 좁고 깊은 농탕(弄堂) 골목이 나타나곤 한다. 육교 맞은편에 입구를 알리는 패루가 서있는 '소가농(蘇家弄)'도 그중 하나로 좁은 골목을 따라 100여 미터쯤 발을 들였다가 그 끝을 알 수 없어 발길을 돌려 되돌아 나왔다.

 

교통편 사정으로 여행일정 짜기가 애매해서 찾지 못했던 징더전을 복잡한 루트를 엮어가며 찾아온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 각지 여러 박물관이나 전시관 등을 둘러볼 때면 전시품 가운데 어김없이 만날 수 있는 도자기에 대한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발한 것이다. 상하이 주변 수향 저우좡의 도자기점에서 자사로 빗은 붉은색 차주전자를 접하고 그 산지인 이싱(宜兴)을 찾았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중국의 도자기 제작 역사는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진나라에서 도자기를 '차이나'라고 부르기 시작하며 중국을 칭하는 이름이 되었다는 설이 있을 만큼 오래되었다. 기실 중국 도자기의 역사는 고대 상나라 때의 회유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그 후 한나라 때의 녹유도기, 당나라 때의 당삼채를 거쳐, 송나라 때는 전국 각지에서 생산되기 시작했고, 원대에는 ‘도자의 길’이라는 해상 실크로드가 생겨나서 해외로 수출되기 시작했다.

 

이곳 징더에서는 한대(漢代)부터 도자기를 생산했고 송대(宋代) 경덕(景德, 1004-1007) 연간에 궁전에서 사용된 경덕진요(景德鎭窯)가 일약 명성을 얻게 되고 해외로 수출도 되었다고 한다. 이 어요창은 명 홍무 2년인 1369년에 창건되어 청나라 까지 542년간 존속했던 황실 도자기 제작 등을 관리하는 기구였다고 한다.

 

도자기로 인해 서구 여러 나라들이 동방 무역로를 찾아 대항해 시대를 열게 된 동기가 되기도 했다니, 지금의 반도체처럼 당시 징더의 도자기 산업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게 된 고부가가치 산업이었던 셈이다.

 

어요창 유적지

어요창(御窑廠) 유적지 공원 입구에 도착해서 무료 예약 후 입장했다. 정문을 들어서니 600년 되었다는 어요 옛 우물('御窑古井')이 맞이한다. 그 오른편 지하 1층 깊이에 명대 도요지 관련 건축물 잔해와 도자기 파편 등 유적지를 발굴 보존해 놓았다.

 

그 옆 선자방(缮瓷坊) 전시실은 검사, 세척, 접착, 加古, 배보, 색깔 복구 등 깨어진 옛 도자기를 복구하는 절차와 방법, 사용된 도구, 사용된 재료 등을 사진과 글로써 잘 설명하고 있다.

 

남송 때의 청백유화 찻잔, 만청 시기 청화 찻잔과 금속 양식 주먹 크기의 차주전자, 명나라 때의 청화용문 주발과 홍운용문매병 등 복구된 유물들이 복구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관람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왼편에는 명나라 중기의 가마 유적인 1500평방미터 넓이의 남록유지(南麓遗址)가 황실에서 사용된 자기를 생산하던 곳임을 증언하고 있다.

 

조금 더 걸음을 옮기면 가마공(窑工) 통빈(童宾, 1567-1599)의 사당인 '우도영사(佑陶靈祠)'가 자리한다. 통빈은 명 만력 연간(1573-1619)에 황궁이 용 항아리를 만들려다 굽는데 여러 번 실패하자 동빈이 강제로 가마에 던져진 후에야 비로소 성공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문득 아이를 넣고서야 완성할 수 있었다는 에밀레 종, 즉 성덕대왕 신종에 관한 전설이 오버랩된다.

 

명 만력 이후 어기창의 동쪽에 통빈을 위한 사당을 지었고, 청나라 어요창은 물을 관장하는 진무(真武), 의(義)를 대표하는 관제(关帝)와 함께 그를 불을 관장하는 풍화선사(风火仙师)로 제사 지냈다고 한다. 징더 도요인들에게 이들을 정신적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존장기활(存长气活)', '자국충혼(瓷国忠魂)', '요업신조(窯業神祖)', '풍화율사(風火傈師)' 등 글귀가 쓰인 현판 아래 도공 인물상들이 통빈(童宾) 조상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통빈의 전설은 흙과 물과 불을 사용해서 고도의 기술과 예술성을 쏟아부어야 비로소 형태를 갖추고 완성되는 도자기는 도공들의 땀과 열정뿐 아니라 신명을 바쳐야만 탄생되는 창조물임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건물 전면 양쪽 벽면에 각각 여섯 마리 용이 부조된 어요공예박물관은 문이 잠겨 있어 그냥 지나쳤다. 너른 공원 여기저기 보이는 관람객들 모습이 많이 늘어났다. 하늘은 비를 뿌릴 듯 잔뜩 찌푸렸지만 깊이 들이마시는 찬 공기는 가슴속으로 상쾌하게 밀려들며 가마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호기심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공원 북서쪽 가장자리 얕은 언덕배기 완만한 계단 위에 4층 높이 용주각(龙珠阁)이 자리하고 있다. 그 입구 양쪽 벽면에 이곳에서 생산된 도자기가 외지로 실려 나갔을 징더전을 가로지르는 창강과 그 주변 거리 모습을 담은 그림이 걸려 있다. 족히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가 넘는데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도자기로 구워낸 그림이라 감탄을 자아낸다.

 

건물 내부 한가운데에는 청대 가마공장(어모창 도자촌) 축소 모형이 자리하고, 좌우편과 뒤쪽 문과 연결된 곁방 벽면에는 징더을 가르 지르는 창허(昌河)의 동편과 서편 풍경화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강남 풍경을 담은 길쭉한 자기 그림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그중 '남성유색(南城柳色)'이라는 표제가 붙은 도자 그림은 범선이 오가는 강가에 연초록 가지를 늘어뜨린 버드나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봄이 기지개를 켜는 이맘때쯤 이곳의 번성했던 시절의 모습을 어림짐작케 해 준다.

 

어요박물관은 어요창(御窑廠) 유적지 공원 맨 뒤쪽 용주각(龙珠阁)이 서있는 언덕배기 아래 평지에 자리한다. 1998년 11월 개관한 이 박물관에는 1,470점의 도자 유물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벽과 천장이 반원형 곡선을 이루는 가마터를 여러 개 모아 놓은 형태로 지상 1층 지하 1층의 독특한 건축물이다.

 

박물관 메인 건물 전면 좌측 화단처럼 조성한 공간에 물을 채웠는데, 수면에 비치는 박물관 건물이 더욱 아름답게 인다. 일견 뜨거운 가마터를 차가운 물로 식힌다는 건축가의 의도가 투영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징더쩐(경덕진)에는 한나라 때부터 도자기 가마가 있었고, 송나라 경덕(景德) 연간에 궁전 자기를 생산하면서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명나라 때 어요(御窯)가 건조되면서 도자기 생산이 더욱 활성화되었다고 한다.

 

이곳 주산(珠山) 황실 가마터에서는 명 태조 때의 도자기 건축 자재가 많이 출토되었는데, 그중에는 장인과 감독관의 이름이 기록된 비문도 있어 당시에 황실 도자 생산자 실명 책임제가 실시된 사실을 알 수 있다.

 

문턱조차 없는 박물관 입구를 미끄러지듯 들어서면 '어요지광(御窑之光)' 주제관이 맞이한다. 지난 40년 동안 징더전 도자기 고고학 연구소는 명청 시기 황실 가마터에서 수 톤의 자기 조각을 발굴함으로써 고대 도자 연구의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했다고 한다.

 

가마형태 건물 사이 공간은 지붕이 없는 열린 공간으로 지하의 옛 도요 유적을 내려다볼 수 있게 배치했다. 전시실의 설명문대로 명청 시기에 제작된 깨진 도자기 파편들과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어 온전한 모습을 되찾은 각양각색 각종 용도의 도자기들을 볼 수 있다.

어요박물관

길고 완만한 계단을 따라 지하 1층 전시실로 내려가면 왕실 도자기의 진수를 모아 놓았다는 '어요지기(御窑之器)' 주제관이 나온다. 뛰어난 솜씨로 제작된 다양한 종류, 우아한 형태, 순수한 유약, 정교한 장식의 황실 가마 작품들은 도자기 제조 역사상 최고 수준의 성취라는 설명을 전시품들이 입증하고 있다.

 

건국과 더불어 외교 활동이 빈번했다는 명태조 주원장(朱元璋, 1328-1398) 치세의 홍무(洪武, 1368-1398) 시기의 큰 사발과 접시는 이슬람 지역과의 공식 외교 활동을 위해 제작된 것이라고 추측된다고 한다.

 

백유 자기는 곡선이 부드럽고 매끄러워 제3대 황제 영락제 치세(1402-1424) 때의 가마 소성 성과를 가장 잘 나타낸다고 평가된다. 귀뚜라미를 좋아했다는 제5대 선덕제(宣德帝, 치세 1425∼1435) 때 제작된 다양한 종류의 귀뚜라미 항아리 도자제품들이 이채롭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다양한 꽃병들은 주로 명 정통 천순(正統 天順, 1435-1464) 시기에 제작된 것이라 한다. 꽃을 꽂은 도자제 화병, 잔, 향로, 향 상자 등이 함께 배치된 당시의 궁중화들이 그 시기 불교, 도교, 조상 숭배 등 제례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알려준다고 한다.

 

주견심(朱見深, 1447-1487)은 어린 왕세자 때 폐위된 불행한 경험으로 나약하고 내성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그의 치세인 성화(成化, 1465-1487) 연간에는 섬세 단아 청신한 청화백자가 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는 홍치제(弘治帝, 1488-1505) 때는 대담한 황색 안료의 접시와 그릇 등 황유 자기가 황제와 황후의 일상용품이나 제물로서 엄격한 통제하에 제작되었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정덕(正德, 1506-1521) 연간은 관심과 미적 취향이 바뀐 사회 분위기로 인해 황실 가마 도자기의 모양과 유약 색상이 손실되는 시기라는 평가이다.

 

황제의 성격과 취향에 따라 어요창에서 생산된 도자기의 형태 또한 천차만별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청와대에서도 취임식, 정상회담, 올림픽 등 중요 행사의 만찬주나 공식 주로 국산 주류를 선정해서 사용해 왔다. 청와대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술도 바뀌어 왔는데 그중에는 매취, 문배주, '강서 마일드 에일' 수제 맥주, 청도 '감그린 아이스 와인', 충북 영동산 와인 등이 있다.

 

밀짚모자를 쓰고 청와대 만찬주였던 '소백산 대강막걸리'를 걸치던 노무현 대통령이나, 농군들과 논두렁에 앉아서 막걸리잔을 기울이던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에서는 친근감과 존경심이 우러난다. 이는 한때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술이었던 막걸리에 대한 막걸리 세대들만의 향수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침청유(一枕清幽)'라는 설명문 옆에는 각종 도자제 베개들이 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송원(宋元) 시대에 유행했지만 명 어요에서는 거의 구워지지 않았던 도자 베개 10개가 2014년 이곳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꽃무늬의 정통 청색 및 흰색의 이 베개를 "여름에 선풍기를 돌리지 않고 겨울에 아궁이 근처에 가지 않는다"는 명나라 6, 8대 두 차례 황제였던 천순제 영종의 생활 습관과 연관 짓는 해석도 있다.

지하 1층 야외 통로를 통해 '청화 특별전시관'으로 들어가서 상주위진남북조 수당송원명(商周魏晉南北朝 隋唐宋元明)까지의 중국 고대 도자기 변천 연표, 자기의 원료가 되는 순백색의 고령토 샘플, 이곳 징더의 자기 생산 역사, 명나라 때의 자기 교역로, 동영상 예술을 활용한 도자기 표면 문양 설명 등의 전시물을 살펴보았다.  

 

어요창 공원의 오른편 담장의 낮은 문으로 나서면 도요 가옥들이 빼곡히 자리했었다는 좁은 영상농(迎祥弄) 골목이다. 그중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는 청대에 지은 170년 역사의 읍산요(邑山窑) 주택은 사방을 둘러싼 건물 가운데 공간이 하늘로 뚫린 형태로 각종 자기들이 건물 내부 진열장을 채우고 있다. 그 옆 서가요(徐家窑)는 청화, 균홍(均红) 등의 자기를 생산하던 곳으로 1979년 문을 닫았다가 2013년 복구하여 생산을 재개했다고 한다.

 

어요창 공원을 뒤로하고 영상농 맞은편 팽가상농(彭家上弄)을 따라 중산북로(中山北路)로 향했다. 이 골목에도 청나라 중기에 건립되어 1979년까지 가마의 불이 타올랐다는 황노대요(黄老大窑), 청 말부터 1962년까지 자기를 생산했다는 유가요(刘家窑) 등 옛 도요 제작 가옥들과 창양서원 등 교육시설들이 높은 담장의 미로 같은  좁은 골목을 따라 연이어 지루하고 있다.

 

남북으로 뻗은 중산북로를 따라 북쪽의 어요경항(御窑景巷) 경관구로 걸음을 옮겼다. '어요경항(御窯景巷)' 경구(景区) 남쪽 가장자리 중산북로의 '안칭 훈툰관(安庆馄饨馆)' 간판이 붙은 노변 식당에서 볶음밥과 훈툰을 한 그릇씩 시켜 이른 점심으로 허허로운 배를 채웠다. 밥값은 십오 위안으로 상하이의 비슷한 로컬 식당에 비해 삼분의 일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징더쩐의 생활물가를 짐작할 수 있다.

어요경항 경구는 구시가지 북부 창강 연안의  남쪽 중도구(中渡口)에서 중산북로(中山北路)를 따라 북쪽 자도 대교(瓷都大桥)까지 약 1.1km에 걸쳐 있는 약 3.1ha에 달하는 구역이다.

 

이곳은 송나라 때부터 명나라 초까지 도자기 생산과 무역의 중심지, 명청 시대에는 수송과 물자의 집산지로서 무역, 인구, 문화가 가장 번화한 곳으로 도자기로서 세계에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108개의 농(弄, 주거지 골목)이 있었는데, 현재는 20여 개가 남아 있고, 선착장, 상점, 민가, 연극무대, 회관, 교당 등 역사적 건축물과 무형문화재가 다수 남아 있고 자기 공예, 민속풍정 등 무형문화가 전승되고 있다는 안내문의 설명이다.

 

중산북로 도로변은 오래되어 낡고 퇴락한 건물들이 옛 영화를 되새김질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중간중간 수리한 옛 건물에 커피숍, 호텔, 웨딩숍 등이 몇몇 눈에 띈다.

 

창강과 너른 둔치를 내려다보며 성곽처럼 축조된 높은 보행로를 따라 걷자니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다. 중산북로는 왼편에 창강을 끼고 북쪽으로 뻗어가면서 오른편으로 좁고 깊숙한 골목, 즉 농(弄)이나 항(巷)을 여러 개 거느리고 있다.

 

용선농(龙船弄)의 양팔을 뻗으면 닿을 듯 좁고 깊이 뻗어 들어간 골목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허물어지고 이지러진 폐가들이 세월의 이끼를 뒤집어쓰고 있다. 필시 퇴락했지만 옛 영화를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유산을 버리지 못하고 깊은 창고에 쌓아둔 것처럼 보존과 철거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방치되어 있는 것이리라.

 

그 사이 몇몇 가옥에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지 골목에서 간간이 주민들이 눈에 띄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는 활기차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그들만의 아지트처럼 그들은 포근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칠 년 전 인천에서 객지 생활을 할 때 밤산책 삼아 둘러보던 퇴락한 인천의 구도심과 흡사해 보인다.

명나라 때 요 씨 상인이 길 입구에 쌀가게를 차렸기 때문에 '하요가농(下姚家弄)'이라는 이름이 붙은 골목은  폭 1.6m에 길이가 190m나 된다고 한다. 그 옆 조양항(朝阳巷), 석사부농(石獅埠弄), 상단포농(上当铺弄) 등도 대부분의 주민들이 떠나가고 적막감이 감도는 낡고 누추한 모습은 매 한 가지다.

 

옥자항(玉字巷) 골목 입구 옆에 '대순포호(大顺布號)'라는 포업을 하던 휘주 상인 즉 휘상(徽商)들의 활약상을 소개하는 복층의 작은 전시관이 자리한다.

 

징더의 비단 산업은 200여 년간 이어졌는데 줄곧 휘상들이 독점적 위치를 점했는데, 1920년대 중반에는 60여 개, 1930년대 초에는 75개의 포목점이 있었다고 고증한다. 주로 비단, 모직물, 면직물과  다양한 색깔의 손으로 짠 무명천 등을 취급했는데 쑤저우, 항저우, 상하이, 후베이 등 지역으로부터 공급되었다고 한다.

 

어요경항 구역 안에 자리한 '징더쩐 옛 도시 박물관(景德镇老城博物馆)'으로 발을 들였다. 박물관 입구에 안내원은 방문객을 힐끗 한 번 쳐다볼 뿐 무료한 듯 의자에 앉힌 몸을 뒤로 젖힌다.

 

송나라 진종(真宗)이 더쩐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기 전까지 이곳 옛 도심은 '창난(昌南镇)' 또는 산남수북(山南水北)의 지형으로 인해 '타오양(陶阳)'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박물관은 '도양십삼리(陶阳十三里)', '공장팔방래(工匠八方来)', '기성천하주(器成天下走)', '노가구 원경(老街区愿景)' 등 네 개의 주제로 천년 자도(瓷都)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다.

 

'노가구 원경' 전시실에는 길 건너 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옥자항(玉子巷) 골목의 옛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 틀어주고 있다. 영상 속 닭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 이웃 주민들끼리 모여 담소하는 모습 등이 정겨워 보인다.

 

인파로 들끓었을 옛 번성기와는 달리 인적이 드문 쓸쓸한 거리와 마찬가지로 넓은 박물관에도 관람객은 한둘뿐으로 썰렁하다. 수박 겉핥기 하듯 전시물들을 대충대충 훑어보고 박물관을 빠져나왔다.

다시 중산북로 나서서 거리를 따라가다 보니 '오왕묘희대(五王庙戏台)' 건물이 나온다. 명말 청초 징더전 도자기의 전성기로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문화적 욕구가 증가하면서 지어진 고대 극장이다.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恒産恒心)"는 맹자의 말처럼 생활이 풍족하면 바른 마음을 견지할 수 있고 즐길거리도 찾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듯싶다.

 

희대는 높은 겹기와지붕에 화려한 목각 장식으로 치장된 건물로 그 앞 공터와 희대 전면과 좌우의 복층 누택(楼宅)에서 관람을 할 수 있는 구조다. 매년 단오, 중추절, 춘절 등 명절에는 각 도자기 업계의 큰 사장들이 대형 극단을 초청하여 이곳에서 각자의 재력과 권세를 과시했다고 한다.

 

마침 중년 여성 사회자가 무대 위로 오르며 '경덕진시 2023년 희곡 특별 공연(专场展演)' 시작을 알린다. 관객은 부근 아주머니들과 거리를 지나던 행인 등 열두서너 명에 불과하다.

 

젊은 여인으로 분한 나이 지긋해 보이는 배우들이 간드러진 음악과 노랫가락에 맞추어 느릿느릿하지만 끊김 없는 동작으로 극 중 인물을 표현하는 모습이 진지하다.

 

어느덧 동서로 뻗은 창강대도(昌江大道)와 중산북로가 교차하는 어요경항(御窑景巷)의 북단까지 왔다. 그 부근 웨딩숍 유리창 너머로 눈에 띄는 젊은 여점원의 도움을 받아서 택시 호출 어플인 '띠디(滴滴)'로 택시를 불렀다. 당일치기나 마찬가지인 짧은 일정이라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않는 한 곳을 골라서 둘러볼 요량이다.

 

당초 점원이 추천해 '도계천 창의광장(陶溪川创意广场)'으로 향하다가 택시기사의 권유로 방향을 도자시장으로 바꾸었다. '징더전 조삭자창(景德镇 彫削瓷廠)'이라는 패루 앞에서 택시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섰다.

 

정자 누각이 있는 작은 언덕을 끼고 남북으로 뻗은 골목을 따라 좌우로 도자기 상점, 도자 공방, 카페 등이 오밀조밀 자리한 이곳은 그 명칭("乐天陶社周六创意市集")처럼 토요일 오전에만 노상(路商)이 열린다고 한다.

 

점포가 없는 요업 종사자들이 토요일마다 이곳 언덕 주변, 골목 공터, 도로변 등에 자신들의 가마에서 직접 생산한 도자 제품들을 펼쳐 넣고 판매를 하는 생업의 현장인 것이다. 오후라 그런지 북적였을 골목은 다소 한산해 보이고 펼쳤던 좌판들을 거두어들이는 모습도 간간이 보인다.

 

중년의 장인이 도토(陶土)로 관공(关公)의 두상을 빚고 있는 공방을 지나서 주산대도시장 북단으로 빠져나가려고 (珠山大道)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낡은 건물 2층에 들어선 '란파이(蓝 π)'라는 카페의 계단을 올라 그 뒤로 이어진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낡은 창문으로 차를 들며 담소하는 젊은 남녀들 모습이 내비치는 골목길 낡은 담벼락 아래 도자제품을 올려놓고 앉아 있는 젊은 여성이 눈에 띈다. 한 평 남짓 넓이 깔개 위에 컵, 주전자, 숟가락, 동물 모형 등 앙증맞은 소품들이 놓여 있고, 둥근 챙 모자에 얼굴이 반쯤 가린 여성은 두 손으로 든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앳된 모습에 "학생이냐"라고 묻는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기를 만드는 일을 하는 도공이라고 대답한다. 후난성 헝양(衡阳)이 고향이라는 이 젊은 여성은 무슨 연유로 도자기 만드는 일을 시작했고 천 리나 떨어진 징더의 후미진 이 골목에 앉아 있는 것일까.

 

시장의 좌판이나 공방의 도예가들과 그녀의 모습에서 문득 몽마르트르 언덕 거리의 화가들이 떠올랐다. 마음속으로 그 젊은 여성 도예가의 성공을 기원하며 발길을 서둘렀다.

 

박물관 속에 진열된 옛 유물들과 더불어 오늘을 살아가는 도자 도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으며 상하이로의 귀로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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