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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성지 보타산을 찾다(2)

라오짱(老張) 2024. 9. 2. 09:39


어느새 물때가 바뀌어서 밀물이 몰려오는지 오르편 바다에서 파도 소리가 수런거린다.
 세 시가 조금 지나 남해관음을 뒤로 하고 보제사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별다른 이동 계획 없이 해안선을 따라 반시계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찾아보려고 한 명소들이 잘 짜인 각본처럼 하나둘 차례로 나타나는 것이 내심 신기하다. 그처럼 보타산은 그리 큰 섬이 아니라는 얘기일 수도 있다.
 
각종 색상과 도안의 깃발을 든 안내원이 이끄는 관람객들 틈에 끼어 자죽림선원(紫竹林禅院)과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观音院)으로 향했다.
 
자죽림선원의 '비운동체(悲运同体)'라는 세로글씨 편액이 걸린 원통보전에는 백옥 아름다운 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이곳의 암석이 자홍색을 띠고 그 단면에 측백나무 잎과 대나무 잎 모양의 무늬가 있어 자죽석이라고 불리며 후대에 자죽을 심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선원 가까운 해변에 보타산이 해천불국이 된 기원이 된 관음상을 모신 불긍거관음원이 자리한다. 관음원 정문 밖 대형 향로에서는 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바다에 접한 암벽 위에 정자 하나가 딸린 관음원의 정문과 불전 모두 규모가 아담하다. 갈라진 바위틈 뚫린 절벽 아래로 파도가 들이 친다.
 
보타산 동남쪽 해변 일대를 둘러보니 우리나라의 태종대, 송도, 해동용궁사, 낙산사 등을 한 곳에 모아 놓은 듯하다는 생각이 다.

 

불긍거관음(不肯去观音)의 유래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정설처럼 잘 알려진 내용과 함께 안타깝게도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얘기도 있다. 불긍거관음의 유래가 당시 보타산 일대의 해상권을 주도하던 신라 상인들에서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중국 낭송 때 발간된 책 <불조통기(佛祖統記)>의 내용에 따라 일본 승려 혜악이 보타산에 처음으로 관음상(불긍거관음)을 모셨고, 그것이 중국 관음성지 보타산의 출발점이라고 알려져 있다. 

 

"일본 승려 혜악(慧鍔)이 오대산에서 관세음보살상을 구해 일본으로 가져 가려는데 배가 바다로 나아가지 않고 한 자리에서 자꾸만 맵  돌더니 암초(신라초; 新羅礁)에 가서 걸렸다. 혜악은 그 관음상을 암초 위에 모셨다."

이 때가 당 함통(咸通 :860~873) 연간인데, 이보다 약 150년 앞선 서 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다른 얘기가 나온다. 

"신라 상인이 오대  산에서 관음상을 새겨 가지고 바다를 건너려는데 배가 신라초에 걸려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신라 상인은 할 수 없이 관음상을 암초 위에 모셨는데, 사람들은 이 관음상이 영험이 있다고 하였다."

_김성문의 <중국 속의 중국> 내용 中  

불긍거관음을 뒤로하고 보제사(普济寺)로 향한다. 1km쯤 거리의 보제사 근처에 다다르자 정문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제일 먼저 다보탑이 맞아한다. 보제사 정문은 운동장처럼 넓은 연지(莲池) 한가운데 아치형 대형 돌다리를 건너 맞은편에 자리한다.
 
보타산 3대 사찰의 하나인 보제사는 약 3.7만㎡ 부지에 10전(殿), 12루(楼), 7당(堂), 7헌(轩)이 자리하고 있는 총 건축면적 1.14만㎡의 제법 규모 있는 사찰이다. 후량(后梁) 시기인 916년에 세워진 이 절은 청 강희제 때인 1699년에 편액을 하사 받고 보제선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네 시가 갓 넘은 시각, 네 시까지 출입을 허용한다는 정문 양 옆 출입구에 붙은 안내문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닫혀 있는 정문 대신 양쪽 동서문 출입구로 드나들고 있다.
 
천왕문을 뒤쪽 입구로 들어서니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가슴을 드러낸 채 가부좌를 한 친근한 미륵보살이 반긴다. 천왕문과 마당을 사이에 두고 금빛 기와 겹처마 지붕의 원통보전이 자리한다.

원통보전 앞마당과 처마 밑 뜨락에는 향을 올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일꾼들은 관람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큰 마대 부대에 담아 옮기기에 바쁘다.
 
2층 처마에 '대원통전' 세로 2열 글자 현판, 1층 처마에 송 황제 영종이 1214년 하사했다는 '원통보전(圓通寶殿)' 가로글씨 현판이 각각 걸려 있다. 보전 안으로 드니 청 강희제가 1699년 하사했다는 '보제군령(普濟群靈)' 현판 아래 보관을 쓴 대형 관음상이 자리하고 있다.
 
원통전 서편에는 양손에 지혜의 책을 가지런히 펴든 보현보살을 모신 보현전, 동편에는 문수전이 각각 자리하고, 보현전과 문수전 뒤쪽에 각각 지장전과 천수관음을 모신 보문전(普门殿), 그리고 원통보전 앞마당 좌우측에 세로 방향으로 각각 조당과 가람전, 양측에 나한전을 배치했다.
 
어떤 보타산 안내도는 보제사의 원통보전, 보현전, 대웅보전, 보문전, 문수전, 가람전 등에 모신 석가모니와 보살들은 각각 가족의 평안, 사업 성공, 극락왕생, 병 치료, 일체 순리 등의 기원을 반드시 들어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경산 팔골산의 갓바위 부처님처럼 신통한 능력으로 중생에게 자비심을 발한다니 천리 먼 길도 마다않고 사람들이 찾아올 법도 하다.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반드시 들어준다는 소문 때문인지 원통보전을 비롯해서 각 불당 안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거나 불당 밖에서 향을 피워 들고 허리를 굽혀 절을 올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작은 깃대를 든 안내원을 따라 단체 참배객 수십 명이 불당 앞에서 향불을 양손에 모아 든 채 동시에 허리를 굽히며 기원하는 모습은 진중하고 장중하다. 법우사를 뒤로하고 예약을 해둔 객잔으로 향했다.
 
일정 구역에 조성된 객잔촌에는 빌라형 3층 높이 건물이 족히 수 백 동이 모여 있다. 그 입구 너른 공터 빨래 건조대에 수 백 장의 흰 천이 가지런히 걸려 있는데 아마도 객잔의 침대보를 말리는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비슷한 건물에 수많은 객잔이 모여 있어 예약한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침대보를 널고 있는 여인의 조언대로 객잔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며 픽업을 오겠다고 한다.
 
객잔 촌 입구로 마중을 온 오십 초반쯤으로 보이는 건장한 객잔 주인은 타고 온 자전거를 끌며 앞장서서 자신의 객잔으로 인도한다. 객잔 주인 아들이 손을 뻗으면 닿는 천장에 창이 있는 3층 지붕밑 객실 방으로 안내한다. 키를 건네받아 단출한 배낭이나마 내리니 어깨가 한결 홀가분해진다.

"자시들러(扎西德勒; 환영, 축복, 길상을 표하는 티베트 말)!
불교 성지에서 이처럼 만난 것도 불가사의한 인연이다. 시장(西藏)에 와서 부처님을 뵙고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이곳 성지에서 멀리 시장의 스님과 짧으나마 교감할 수 있어 반가왔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다시 뵙기를 바라며 평안한 여행 되세요."
 
남천문 부근에서 조우했던 스님이 위챗 메시지를 보내왔길래 나도 답신을 주었다. 짧은 순간 스쳐 지나며 몇 마디 나누고 위챗(Wechat) 친구라도 트면 관계를 이어갈 수 있으니,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더욱 실감 나는 세상이다. 맺는 인연이 아름다운 인연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뉘엿뉘엿 어둠이 깔리고 천장 창틀로 들어오는 하늘에서는 정월대보름을 앞둔 둥근달이 구름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객잔촌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후 객잔 주인의 식당에서 볶음 요리 두 가지에 밥을 시켰다. '보타산(普陀山)' 브랜드 캔맥주 한 병을 반주 삼으니 길었던 하루를 마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어쩌면 어긋날 수도 있는 계획과 일정이 운 좋게 맞아떨어지고, 대범함을 가장한 무모함으로 무장하고 호기심을 동반자 삼아 분주히 발길을 옮긴 여정이었다.
 
서천경구(西天景区)
밤하늘 검푸른 구름이 정월 대보름을 앞둔 만삭의 달과 유희하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아침 여덟 시 조금 못 미쳐 객잔을 나섰다. 침대 커버 세탁이나 청소 등 허드렛일을 맡아하는 아주머니가 문 밖에서 방 키를 건네받는다. 밝은 아침에 살펴보니 객잔촌은 북동쪽에서 서남 방향으로 뻗어 내린 두 줄기 능선 사이에 아늑히 안겨 있다.
 
그 북쪽의 능선을 따라 서천경구(西天景区)가 어제 들렀던 보제사까지 약 1.5km가량 펼쳐져 있다. 바위 능선을 따라 관음고동(观音古洞), 이구청법석(二龟听法石), 반타석(磐陀石) 등 수많은  볼거리들이 모여 있다니 자못 기대가 된다.
 
해안까지 뻗은 가장자리에서 서천경구(西天景区)로 들어서니 해발 50미터 높이에 개병선원(芥瓶禅院)이 자리한다. 금강역사상 부조 두 위가 굳게 닫힌 선원의 정문 양쪽에서 굳센 기상을 뿜어 내며 불문을 지키고 서있다.
 
두 금강 중 오른쪽의 나라연금강은 힘의 세기가 코끼리 백만 배가 된다고 하니 불경한 자들은 감히 가까이 얼씬도 할 수 없을 듯하다. 출입문으로 난 사다리꼴 계단 위에 올라서서 눈앞에 펼쳐져 있는 객잔촌과 앞바다를 한동안 조망했다.
 
지척 거리에 있는 관음고동(觀音古洞)의 '관자재(觀自在)', '관세음보살' 등 글귀가 쓰인 담장을 지나 사원 경내로 들어섰다. 돌계단 위 마당 건너편 암벽 아래 석굴에 석불 세 좌를 비롯해서 여러 불상을 모셨다. 관음성지답게 석굴 오른편에는 관음보살상을 모신 원통보전이 번듯하게 자리한다.
 
관음은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한다는 보살이다. 통상 머리에 보관을 쓰고, 한 손에 버드나뭇가지나 연꽃 다른 손엔  정병을 들고 있지만 수월관음, 백의관음, 십일면관음, 천수관음 등 관자재(觀自在)라는 또 다른 이름처럼 형상도 자유 자재하다.

아주머니 대여섯 분이 좁은 석굴 안에서 '관세음보살'을 쉬지 않고 암송하며 심중에 싸들고 온 바람을 갈구하고 있다. 그 소리가 마치 새들이 지저귀는 듯 아름답고 간절하다. 관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재롭게 관조(觀照)하여 보살핀다니 허황될 리 없는 저분들의 소원도 필시 들어주시지 않을까.
 
사람들 발길은  능선 아래쪽에서 관음고동으로 난 좁고 긴 돌계단 길을 따라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고동 뒤쪽으로 난 돌계단을 휘돌아 산마루 위 극락정(极乐亭)이 자리한 가장자리에 올라섰다. 저우산 섬 사이에 너른 바다를 온전히 드러내 보여주는 툭 트인 전경을 한동안 조망했다.
 
능선 위쪽으로 이동하면 두 마리 거북이 설법을 듣고 있는 형상의 이구청법석(二龟听法石),  바위 위 또 다른 큰 바위에 새긴 '반타석(磐陀石)' 암각자가 차례로 자리한다.
 
해발 약 100미터 지점에 자리한 반타석(磐陀石) 근처 화장실이 인상적이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었던 좌변기, 온풍기, 휴대폰 충전기, 그리고 세면대 옆에 생화처럼 생기 있는 조화까지 놓여 있다. 내부 벽면에 붙어 있는 '화장실이 곧 문화(文化則厕)'라는 문구가 부끄럽지 않아 보인다.
 
반타석 뒤쪽 불경 암송소리 은은히 울려 나오는 영석선원(灵石禅院)을 지나 조금 더 오르니 능선 사면 가장자리에 조망대가 나온다. 수목이 무성한 가파른 산록 아래 어제 하룻밤을 묵었던 객잔촌, 그 뒤쪽 능선 끝의 남해관음상, 바다 너머 낙가산 등 여러 섬들이 펼친 파노라마가 한눈에 들어온다.
 
석재 난간에 각인된 글귀 '불재심중(佛在心中)'처럼 곳곳 눈 닿는 곳마다 사원이요 암자요 불상이니 보타산은 말 그대로 불국이요 부처의 품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백처럼 앙증맞은 붉은 꽃을 피운 홍산차(红山茶)와 광옥란 나무가 담장 주위에 서있는 매복선원(梅福禅院) 안으로 발을 들였다. 관음을 모신 다른 곳들과는 달리 이 선원 불당에는 '대웅보전' 현판이 걸려 있다.  '감로청량(甘露请凉)'이라는 현판 아래 정수리에 홍옥처럼 붉은 장식이 달린 석가모니상을 모셨다.
 
보타산 전체가 관음성지이나 필시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셨을 터이지만, 마음속 궁금증이 확실히 알아보라고 채근한다. 보전 입구 오른편 구석 의자에 앉아 아침 식사라며 캔에 담긴 음식을 들고 있던 스님에게 답을 구했다.
 
서투른 내 중국어에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스님에게 한국인이라고 하니 가까이 다가오며 귀를 기울인다. '먀오샨(妙善)'이라는 젊은 비구스님은 이곳은 여승 열세 분이 수도하고 있는 비구 선원이라고 한다. 대답과 함께 덤으로 불경 암송구가 수록된 '관세음보살보문품(观世音菩萨普门品)'과 '금강반야바라밀경' 한 권씩을 건네주는 스님에게 합장으로 답하고 선원을 나섰다.

능선 가장자리에 석재 난간을 설치한 반듯한 화강석 돌길을 따라가다 보면, 해발 150미터쯤에 원통선림(圆通禅林)이 자리한다. '해산제일암(海山第一岩)'이라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 이 선원은 역사가 15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암자다.
 
가파른 돌계단 위 미륵보살과 사천왕상이 자리한 천왕문을 지나 원통보전에 발을 들였다. 좌우에 법고와 범종이 자리하고 왼손 바닥에 보병 들고 있는 대형 관음상이 아름다운 나한상들에 둘러싸여 좌정하고 있다.
 
좌측 법당에서는 불경 암송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오고 있다. 중국 다른 곳 유명 사찰들과는 달리 보타산 여느 사찰이나 암자에서는 스님들 모습이 많이 눈에 띈다. 스님들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깨우치기 위해 정진하고 있는 살아 있는 불도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외지에서 이처럼 밀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시장바닥 못지않게 번잡한 상황에 구애됨 없이 제대로 수행을 해 나갈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원통전 뒤 어깨 높이 크기의 아름다운 모습의 백옥석 관음이 자리하고 있는  정법명여래전(正法明如來殿)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원통선원 빠져나왔다.
 
서천경구(西天景区)는 보제사 쪽으로 난 가파른 내리막 돌계단으로 접어들면서 경사진 바위에 한자 '심(心)'이 각인된 '심자석(心字石)'을 마지막 볼거리로 내놓으며 끝을 맺는다.
 
아직 희미한 태양은 아침 공기의 냉랭한 기운과 씨름하고 있다. 서천경구 동쪽 가장자리로 나서서 보제사 쪽으로 가니 주변과 경내는 어제에 비할 바 없이 인산인해다. 인파에 밀려가며 어제 자세히 둘러지 못한 보문전의 천수관음상 등을 서둘러 훑어보고 출구로 빠져나왔다.

에필로그..
보타산에서 만났던 티베트의 스님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아마도 순례를 마치고 무사히 돌아가셨나 보다.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학용품을 나눠주며 자비심을 실천하고 계시는 모습에 절로 존경의 마음이 우러난다.
 
"자시들러(扎西德勒), 안녕하세요!
이제 학생들이 모두 개학을 앞두고 있습니다.
간쯔짱구 쪽에서는 산간 지방과 목초지의 비교적 외딴 지역과 어려운 조건의 아이들과 고아들에게 매년 찾아가면 도와줄 일이 있는데, 이번에는 또 가서 그들에게 옷과 책가방 용품 등을 좀 나누어주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아미타불"
_菩提心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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