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오디세이

관음성지 보타산을 찾다(1)

라오짱(老張) 2024. 9. 1. 12:03

보타산 찾아가는 길

춘절 연휴가 끝나자 냉랭하던 날씨도 다소 풀렸다. 일기예보가 주말부터는 흐려져 다음 주 내내 비 소식을 전한다. 상하이에서 직선거리상 멀지 않지만 마땅한 교통편을 찾지 못해서 마음속에 담아두기만 했던 보타산(普陀山) 출행을 감행키로 했다. 중국 4대 불교 성지 중 하나로 관음보살 상주처로 알려진 곳이다.

 

차를 운전해서 가는 번거로움이 싫어서 대중교통편을 찾아보니, 상하이 남부버스터미널에서 보타산 부근 버스터미널까지 가는 버스 편을 확인했다. 버스표 예매 앱("去哪儿旅行")을 사용하려면 본인 실명인증이 필요한데, 외국인이라서 그런지 신청 후 이틀이 지나서도 '심사 중'이라는 메시지만 뜬다.

 

앱에서 보타(普陀) 행 첫 버스 출발시간을 확인 후 터미널로 가서 직접 티켓팅을 할 요량으로 6시 조금 넘어 집을 나섰다. 빈 좌석이 있으면 좋겠다.

 

밤새 비가 뿌렸는지 도로 바닥이 조금 젖어 있다. 아파트 출입구 관리인, 도로 청소차, 환경미화원, 공차 표시등을 밝힌 택시,... 여느 날 이른 아침의 모습과 다름없다. 지하철 15호선 야오홍루(姚虹路) 역에서 06:18경 전철에 올랐다. 대부분은 나이 지긋한 초로의 승객들이 드문드문 좌석에 앉아 있다.

 

전철역에서 지하보도를 따라 10여 분을 걸어서 남부 장거리버스터미널(长途南站)에 도착했다. 높은 천장의 아담한 터미널 내부는 두 해 전 이곳에서 우쩐행 버스를 탔던 기억 그대로의 모습이다.

 

붐빌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티켓창구 앞에는 예매하려는 사람이 네댓 명뿐이다. 07:37 출발 첫 버스 좌석도 여유가 있어 다행이다. 같은 시간에 출발하는 버스 승차권 가격은 150위안과 225위안으로 조회되는데 같은 버스의 앞자리 우등석과 뒷자리 일반석으로 구분된다.

 

출발 시각까지는 시간이 넉넉하다. 대합실로 들어서서 화장실을 다녀오고 믹스커피를 한 잔 들었다. 내일 돌아오는 차편은 보타 장거리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예매해 두면 될 것이다.

상하이 남부 장거리버스터미널(长途南站)

보타산 섬 안에서 숙박을 할 요량으로 미리 확인해 두었던 객잔으로 전화를 했다. 아직 빈 방이 있다는 목소리에 안도감이 들고 가격도 확인해 두었던 그대로라는 대답도 반갑다. 위챗 페이로 송금하고 예약을 마치니 오늘 밤 잠자리도 마련된 셈이다.

 

출발하는 35인승 버스에 올랐다. 지정 좌석 대신 옆 좌석이 비어 있는 뒷좌석으로 옮겨 앉았다. 터미널을 빠져나온 버스가 도심을 벗어났다. 하늘은 잔뜩 찌푸렸지만 벼루어 오던 보타산으로 향하는 마음은 더없이 가볍다.

 

이른 아침부터 초조와 긴장의 순간들이 지나고 난 탓인지 폭신한 좌석에 안긴 몸에 노곤함이 몰려왔다. 비몽사몽 조는 사이 버스는 한 시간 20여 분만에 항주만과해대교(杭州湾跨海大桥) 남안 휴게소에 도착해서 20여 분간 정차했다.

 

목적지까지는 절반 조금 더 남은 셈이다. 휴게소 매점에서 쟈오즈(饺子) 몇 개를 사서 출출해하는 배를 달랬다. 승객 누군가가 기사에게 요청했는지 히터가 들어오기 시작한 버스 안이 훈훈해졌다.

 

버스 좌석 등받이마다 10인치 크기의 액정 모니터가 달려 있다. 영화, 게임, 음악 등 메뉴 중에서 쟝원(姜文) 감독의 1995년 상영작 영화 '햇살 찬란한 날들(太阳灿烂的日子)'을 골라 보았다.

 

'썬하이 고속도로(沈海高速)'에서 내려 '닝보 순환고속도로(绕城高速)' 북단을 지나 '용저우 고속도로(甬舟高速)'로 옮겨 타고 바다 위를 가로질러 저우산 섬으로 들어간다. 저우산(舟山) 군도(群岛)의 크고 작은 섬들은 모두 산지 지형으로 물 위에 기묘한 수석들을 길게 펼쳐 놓은 듯 장관이다.

 

진탕 대교(金塘大桥), 시허우먼 대교(西堠门大桥) 타오야오먼 대교(桃夭门大桥), 샹자오먼 대교(响礁门大桥)를 차례로 지나며 저우산 본 섬으로 들어섰다. 비둘기 떼 한 무리가 돌고래 떼가 무리 지어 헤엄치듯 질서 정연하게 대오를 맞춰 공중 높이 선회하며 환영 인사를 보낸다.

 

딩하이(定海) 터미널과 신청(新城) 터미널에 한 번씩 정차하며 섬을 관통해서 정오 무렵 푸퉈 장거리 여객터미널(普陀长途客运中心)에 도착했다. 켜 놓은 모니터에서는 문화 대혁명 시기 눈부신 햇살과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베이징 부대 마당을 배경으로  아이들의 치기와 풋사랑의 감정을 담아낸 영화가 엔딩 크레딧을 올리고 있다.

 

내일 상하이로 돌아가는 버스 승차권을 넉넉잡아 오후 5시 출발 편으로 예매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터미널 광장 건너편 택시 승강장에서 택시에 올라 10km 남짓 거리 주쟈젠 우공쓰 선착장(朱家尖蜈蚣峙码头)으로 이동해서 보타산행 배표를 구입했다.

 

춘절 기간에 비해 여행객이 많이 줄었다는 매표원의 말이 무색하게 승선장 입구는 사람들로 빼곡하다. 남녀노소 승객을 가득 태운 450인승 '신하이화(新海华) 68호'가 크고 작은 섬들로 둘러싸인 내해를 건너 10여 분만에 보타산 부두에 닿아 승객들을 토해 놓았다.

해천불국(海天佛国) 으로

오후 한 시, 좋은 시각이다. 선착장과 연결된 여행자센터에서 섬 입장권을 끊어 보타산 섬 안으로 들어섰다. 보타산은 저우산 군도 오백여 개의 섬 가운데 하나로 남북 8.6km, 동서 최대 폭 4.3km, 면적 약 13㎢로 최고봉인 불정산(佛頂山)은 해발 290여 미터이다.

 

천고기서(千古奇書)로 불리는 <서하객유기(徐霞客游記)>를 남긴 명나라 때의 인문 지리학자요 여행가로 알려진 서홍조(徐弘祖, 1586-1641년)도 이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새벽안개를 지고 길을 떠났다가 저녁안개를 지고 돌아오는 나그네’라는 뜻의 '하객(霞客)'이라는 별명 그대로 그는 스물두 살 때 여행을 시작해 30년 넘게 중국 전역 약 12,000km를 여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타산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당나라 초기 일본 승려 혜악(慧嶽)과 관련이 있는데, 전하는 내용은 아래와 같다.

당나라 때인 862년 혜악이 오대산(五臺山)의 관세음보살상을 일본으로 모셔 가려고 닝보(寧波)를 출발했는데 태풍과 폭우 때문에 매령산(현 보타산) 조음동(潮音洞)에서 배에서 내렸다.

그곳 불자 장 씨(張氏) 부인은 쌍봉산(雙峰山) 자신의 자택 별실에 그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혜악은 관세음보살이 일본으로 가기 싫어한다고 생각되어, 보타산에 관음원을 지어 이름을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觀音院)이라고 했다.

송나라 초에 매령산을 보타산으로 개칭하고 송 태종 3년에 보제사(普濟寺)의 전신인 오대원광사를 지었는데 이때부터 보타산이 관음보살의 도량이 되었다.

 

청나라 건륭(乾隆) 년간 보타산에는 보제사(普濟寺), 법우사(法雨寺), 혜제사(慧濟寺) 등 3개의 큰 사원과 88개의 암자, 148개의 기도원이 있었다고 하니 그때나 지금이나 섬 전체가 불국토나 다름없다.

 

가급적 모두 둘러서 돌아볼 요량으로 명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반시계방향으로 걷기로 했다. 전통 번자체로 '보타성경(普陀聖境)'이라고 쓰인 명패가 걸린 문루를 통과했다. '해천불국(海天佛国)'의 성스러운 품속으로 들어선 셈이다.

 

중국은 2천 년 이상 통용해 오던 전통 중국어 '번체(繁体)'를 1935년 국민정부의 <제1차 간체자표>, 1956년 중화인민공화국의 <한자 간소화방안> 등을 통해 획수를 줄이고 쉽게 표기할 수 있는 '간체자(简体字)'를 공포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문화재, 성씨, 서예, 각인, 또는 특별히 필요한 상황 등에서는 번체자를 사용하고 있다. 패루나 사찰의 편액 등도 모두 번체로 씌어져 있는데, 자기의 역사와 문화에 자부심이 남다른 중국인들이 전통 글자인 번체를 용도폐기하는 날은 아마도 오지 않을 것이다.

제일 먼저 선착장 지척 해변에 접해 있는 자운선사(慈雲禅寺)가 맞이한다. 농구 코트 넓이의 아담한 경내로 들어서니 원통자재 편액 아래 관음보살이 정좌하고 있다. 그 앞에서 참배객 몇 분이 향을 피워서 두 손 높이 들며 절을 올리고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 대부분은 가족, 연인, 친지, 친구 등 둘 이상의 단체 방문자로 참배, 순례, 관광, 유람 등 다양한 계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지역 번호판을 단 버스나 깃발을 든 안내자를 따라 이동하는 단체 여행객들, 어느 지방 사투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투의 관람객 등이 많이 눈에 띄는 것을 보면 부근은 물론 멀리에서까지도 찾아왔음을 알 수 있다.

 

섬 순환로 도로변에 늘어선 식당 중 뷔페식 식당 한 곳에서 가지볶음에 곁들여 간단히 점심을 들었다. 여느 유명 관관지처럼 일반 로컬 식당의 동일한 메뉴보다 두 배 정도로 물가가 비싼 것은 이곳도 예외는 아니다.

 

키 낮은 붉은 동백꽃, 통통통 어선 엔진 소리, 해안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소리 등이 어우러진 길을 따라 섬 속의 섬처럼 돌출된 지점에 자리한 남천문(南天門)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야트막한 언덕 위에 '신라초(新罗礁) 기념비'가 남쪽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다. 2003년 저우산시와 '한국 해상왕 장보고기념사업회'가 세운 비이다. 장보고는 중국 명주(明州; 현재의 닝보)의 관문이자 동남해운의 요충지인 보타산 경유 항로를 많이 이용했는데, 이곳 앞바다에 암초가 많아 당시 '신라초'라고 불렀다고 한다.

 

짧은 돌계단 위 어른 키높이 바윗돌 두 개에 '남천문(南天門)'이라는 한자 글이 쓰인 바윗돌을 얹은 문을 지나니 '대관봉(大观蓬)'이라는 절집이 맞이한다.

 

연꽃을 든 순백색 관음이 맞아주는 이 절집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하여 선착장, 진샤(金沙) 해변과 그 끝 멀리 자리한 해수관음상, 바다 건너 저우산 본섬 등을 두루 조망할 수 있다. 부산의 송도를 찾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남쪽 바다 해면에 한낮 햇빛이 반금되며 금싸라기처럼 반짝인다.

 

주홍빛 가사를 입은 스님과 좁은 길에서 마주쳤다. 티베트 참두(昌都)에서 순례를 왔다는데 주저 없이 순례 비용이 넉넉지 않다고 하는 말에 마침 수중에 있던 지폐 한 장을 꺼내 즉석 시주를 했다. 위챗 아이디 '보리심(菩提心)'의 그 스님은 티베트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 바란다는 인사말로 고마움을 대신한다.

썰물 때라 바닷물은 진샤(金沙) 해변 밖 멀리 물러났고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밭 위엔 발자국들이 빼곡하다. 저쪽 모래사장 끝 바다로 길게 뻗은 능선마루에 우뚝 자리한 남해관음상이 지척이다. 관음상은 보타산 동남쪽 바닷가 언덕 위에 위치해서 섬 높은 곳 어디에서나 눈에 들어온다.

 

보제사(普濟寺) 쪽 길과 합쳐지는 능선으로 올라서서 등엔 작은 배낭 손엔 향통이나 향이 든 쇼핑백을 하나씩 든 사람들 틈에 끼어 걸음을 옮긴다. 남해관음상 아래쪽 바닷가에 있는 서방정원(西方净苑)엘 먼저 들렀다. 원통보전에는 한바이위(汉白玉)라는 순백색 옥돌 아름다운 관음상이 자리한다. 입구 천왕전의 천왕과 다른 불상들도 모두 흰 옥석으로 조성한 것이 독특하다.

 

패루를 지나 경사진 언덕길을 휘도는 계단을 오르면 운동장처럼 넓은 3단 대리석 마당의 뒤쪽 중앙 높은 기단 위에 거대한 관음상이 배의 키로 보이는 모형을 가슴 높이로 펴든 손바닥에 들고 우뚝 서 있다.

 

이 남해관음대불(南海觀音大佛)은 1997년에 세워졌는데, 관음상의 높이 18m, 연꽃 받침대 2m, 3층 받침대 13m를 합하여 총높이가 33m이고, 무게는 70여 톤에 달한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두 손에 향을 피워 들고 몸을 굽혀 복을 기원하고, 대형 향로 부근 사람들은 손때가 타서 황금처럼 반들반들 빛나는 향로를 어루만진다. 연기가 자욱한 인파 속을 지나자니 향불 열기가 얼굴에 확 와닿는다.

 

세 시가 조금 지나 남해관음을 뒤로하고 보제사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어느새 물때가 바뀌어서 밀물이 몰려오는지 오른 편 바다에서 파도 소리가 수런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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