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칭을 향하여
승객을 가득 채운 A320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올랐다. 비몽사몽 하는 사이 푸동공항 제2터미널을 이륙한 지 두 시간 반만인 새벽 1시 반경 충칭 쟝베이(江北) 공항 제2터미널에 안착했다. 중국 국경일 긴 연휴를 앞두고 동료 한 분과 후배 한 명 등 셋이 충칭 출행을 계획을 하고 결행을 한 것이다.
병아리처럼 길게 늘어선 노란색 자그마한 택시들이 도착 홀 밖 승강장으로 연신 들어와선 승객들을 태우고 빠져나간다. 지상과 지하를 교차하며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입체형 도로를 롤러코스트 타듯 좌우로 흔들리며 달린 작고 낡은 택시가 10여 분만에 공항 인근 호텔 부근에 도착했다.
외국인 투숙 여부를 사전에 확인하고 예약을 했지만 화위호텔(华裕酒店) 프런트 직원의 투숙 절차는 느려 터져서 피로감이 배가된 느낌이다. 새벽 세 시쯤이 되어서야 방 키를 받아 무거운 몸을 누일 수 있었다. 7시 반경 몸을 일으켜 배낭을 챙겨 들고서 부근 식당에서 매운 국물에 면과 함께 편육 콩 채소 등을 첨가한 충칭 지역의 면을 한 그릇씩 시켜서 들었다.
#계절을 잊은 화로의 도시
따처를 해서 차에 올랐다. 기사가 오늘 기온이 33~34도라는 예보가 있었다고 한다. 10.1일 중국의 국경절 충칭의 도로는 아침부터 통행 차량이 적지 않다. 차량들은 모두 충칭을 의미하는 '위(渝)' 자로 시작되는 번호판을 달고 있어 넓디넓은 중국 대륙의 한가운데 자리한 도시에 왔음을 실감케 한다.
인구 3200여만 명의 충칭은 준수한 구릉성 산지에 창장(长江)과 자링강(嘉陵江) 등 큰 하천이 굽이 흐르는 수려한 산수를 자랑하며 강의 도시(江城), 안개 도시(雾都), 다리의 도시(桥都), 산의 도시(山城)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시내의 IBI*호텔에 배낭을 내려두고 스마트 폰으로 예약 후 산샤(三峡) 박물관으로 향했다. 충칭시 위쭝취(渝中区)는 쟈링강(嘉陵江)과 창장(长江)이 서로 만나면서 그 사이에 위치한 가마우지 머리처럼 길쭉한 지형으로 임정청사, 해방비, 홍애동 산샤 박물관 등 오늘 둘러볼 곳들이 한 지역에 가까이 몰려 있다.
쟈링강(嘉陵江) 대교를 건너 위쭝취 산샤 박물관(三峡博物馆)에 도착했다. 북경의 천단과 흡사한 모양을 한 인민대례당 맞은편 계단 위 언덕에 자리한 박물관 앞에는 남녀노소 안으로 입장하려고 늘어선 줄이 벌써 장사진을 쳤다.
둥근 돔형 천정이 보이는 너른 홀에서 나선형 계단을 따라 맨 위층인 4층으로 올라갔다. 4층의 역대 서화(历代书画), 역대 도자(历代瓷器), 개관 70주년 특별전, 3층의 파촉 한대 조삭 예술(巴蜀汉代彫削艺术), 서남 소수민족 민속, 역대 화폐(钱币), 항전 세월(抗战岁月), 2층의 충칭 성시의 길(重庆 省市之路), 1층의 웅장하고 미려한 삼협(壮丽三峡) 등을 세 시간 여에 걸쳐 들러보았다. 이 박물관도 중국 여느 도시의 박물관처럼 선사시대부터 청동기 철기를 거쳐 여러 왕조와 근현대에 이르는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방대한 유물과 사료로써 관람객들에게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박물관을 나서서 충칭 인민 대례당을 배경 삼아 사진 한 장 남겼다. 점심때가 다 된 터라 부근 미식가 건물에 들어섰더니 많은 사람들로 북적여 정신이 번잡하다. 다시 건물에서 나서니 도로변에 '광장완잡면(广场豌杂面)' 간판이 걸린 자그마한 식당의 눈에 들어온다. 주문을 하고 문밖 간이 의자에 앉아 충칭 특유의 매운 듯 입맛을 당기는 국수 한 그릇씩을 들었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수많은 식당들 중 하나면 그 어디든 족하다고 여기는 내 스타일과는 달리, 해외 여행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책자나 블로그 등에 소개된 맛집만을 고집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일주일 이내의 짧은 외국 출장 때에도 대부분의 동행들은 굳이 일부러 찾아가야 할 이유도 없는 현지 한국식당을 고집하기 일쑤였다.
다음 행선지는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다. 1919.4.11일 상하이에서 수립된 임정은 항저우, 자싱, 난징, 창사, 광저우, 그리고 이곳 충칭으로 옮겨오며 고단하고 지난한 중국 내 독립투쟁의 역정을 이어왔다.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원들이 1940.9월 충칭으로 옮겨온 후 1945년 1월부터 8월까지 이곳 연화지 청사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임정 청사는 언덕에 계단식으로 배치된 3층 높이 건물로 하늘을 가릴 듯 높은 빌딩들 틈새에 끼어있다. 도시 재개발 계획에 따라 철거 위기에 놓인 것을 독립투사 이달 선생(1907-1942)의 따님 이소심 여사가 한중 양국 정부에 호소하여 간신히 철거를 면하고 유적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하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임정 청사에서 나와 굴곡진 구릉 위에 자리한 고층 건물들의 숲, 경사진 도로를 달리는 차량 행렬, 그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시민들 등 중칭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해방비(解放碑) 보행자 거리(步行街)까지 걸어서 갔다.
높이 27.5미터의 해방비는 항전 승리 기공비(抗战胜利纪功碑) 또는 인민해방 기념비(人民解放纪念碑)를 줄여서 부르는 말로 1947년 10월 10일에 준공되었으며 항일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비이자 충칭시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린장먼(临江门) 역에서 전철 2호선을 타고 3호선과 교차하는 뉘우쥐에퉈(牛角沱) 역을 지나 건물 속으로 전철이 통과하는 곳으로 유명세를 탄 이자바(李子坝) 역에서 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족히 10여 층 높이가 됨직한 계단 아래 전철역이 한눈에 들어오는 강변도로로 내려서서 터널처럼 생긴 빌딩 속 철로를 들고나는 전철을 분주히 스마트 폰에 담는다. 나중에 양칭(梁庆) 감독의 영화 <火锅英雄>을 보니 방금 본 장면이 나오고, 지하에도 방공호가 거미줄 처럼 얽혀 있다고도 하니 충칭은 SF 우주영화에 나오는 도시를 닮았다는 생각이 더 굳어진다.
린장먼(临江门) 역으로 되돌아와서 홍야동(红崖洞)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만난 온통 새빨간색으로 치장한 웅장하고 독특한 디자인의 국태예술센터(国泰艺术中心) 건물이 오래도록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극원과 미술관으로 구성된 이 건물은 2013년 준공된 것으로 "서로 껴서 교차하고(穿插), 쌓아 올리고(叠落), 길게 늘어뜨리고(悬挑), 높이 맞받아 들어 올려(高高迎举), 자연스러움을 따른 것(顺势自然)이 충칭인들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설명이 마음에 와닿는다.
#중경삼림과 충칭
거장 왕가위 감독의 1994년작 영화 <중경삼림(重庆森林), Chungking Express>은 기실 이 도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충칭'하면 언젠가 한 번쯤은 보았을 터인 그 영화가 떠오르고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의 창고를 헤집어 보곤 했었다.
마지막 날 들렀던 츠치커우 꾸쩐(磁器口古镇)의 종가원(钟家院) 건물 내부에 '옛 충칭(Old Chongqing)' 사진과 함께 걸려 있던 '현재의 충칭' 사진 속 빌딩 숲은 '충칭의 울창한 숲'이라는 영화 제목처럼 수목이 무성한 밀림을 연상케 했었다.
창바이로(沧白路)에서 이어지는 홍야동(红崖洞)은 건물 최상층에 해당하며 아래쪽 강변도로에 접한 절벽에 기대어선 11층 건축물이다. 강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 절벽에 기대어 들어선 층층 겹겹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그 내부로 난 계단길이 지하 1층까지 미로처럼 이어진다.
말로써는 도저히 다 묘사해 내지 못할 홍애동을 "일태(一态; 문화 레저 업태), 삼절(三绝; 吊脚楼, 集镇老街, 巴文化), 네 거리 (四街), 팔경(八景; 两江汇流, 城市阳台 등 8가지 경관)"으로 축약해서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중국인들의 친절이 고마울 따름이다. 어둠이 내릴 때까지 기다려 휘황찬란하게 불을 밝히는 홍야동의 황홀한 야경에 취해 오래도록 빠져나올 수 없었다.
밀물에 휩쓸리듯 인파 속을 헤집으며 홍야동 풍경구 입구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서 차를 불러(打车)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앞 회족 식당에서 꼬치구이 챠오판(炒饭) 로컬 맥주(国宾, TUBORG) 등을 주문하고 일행들과 야외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새벽잠을 자고 일어나서 시작한 거대 도시 충칭에서의 첫날 빽빽한 일정의 기행을 차질 없이 다 마친 셈이다. 하루 동안 만만찮았던 긴장과 쌓인 피로가 눈 녹듯 녹으며 안도감이 밀려든다. 훠궈처럼 맵고 뜨거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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