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가 지나고 계절이 겨울의 깊은 골짜기로 접어들었다. 상하이 아파트의 난방이 시답잖아 한국에서 가져온 전기요가 요긴하다. 당직 근무를 인계하러 근무일지와 매뉴얼이 든 가방을 둘러메고 아파트를 나섰다. 싸늘한 공기가 상하이에도 이제 겨울이 왔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아파트에 둘러싸인 정원의 큰 은행나무 한 그루는 며칠 전까지 가지마다 무성히 달고 있던 황금빛 잎사귀들을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다.
거리의 행인들은 모두 두터운 외투 차림이고 휴일 아침이면 눈에 많이 띄던 조깅족들 모습도 뜸하다. 아파트와 상점들이 줄지어 선 약 1km 길이의 황금성도(黄金城道) 보도의 공터마다 나이 지긋한 주민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건강 체조에 여념이 없다.
당직 가방을 다음 근무자에게 넘겨주고 가까이에 있는 홍바오시루(红宝石路) 역에서 전철을 타고 구이린루(桂林路) 역에서 9호선으로 바꿔 탔다.
송쟝남역(松江南站)에서 차오루(漕路)까지 연결하는 이 노선 전철은 평일 출근길 마냥 객실마다 승객들을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태웠다. 그에 비해 루지아방(陆家浜) 역에서 갈아탄 황푸강 건너 푸동 쪽으로 가는 8호선은 듬성듬성 빈자리가 눈에 띈다.
중화예술궁(中华艺术宮) 역에서 내렸다. 역사를 빠져나오니 중화예술궁으로도 불리는 상하이 미술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를 격자처럼 엮어 쌓아 놓은 것처럼 독특한 양식의 미술관은 온통 붉은색으로 언뜻 한자 '華'를 형상화해놓은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 좌측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축대처럼 너른 계단 위 높이 동향을 하고 자리한 미술관의 정면 입구로 들어섰다. 층간을 연결한 에스컬레이터는 외부로 노출되어 있어 아레나 등 주변의 빌딩군들이 눈에 들어온다. 10층으로 올라가서 예술 명인들의 작품을 전시해 놓은 여러 전시실부터 차례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전시실의 표제는 당나라 때의 시인 장구령(张九龄, 678-740)의 시 <望月怀远>의 첫 구절 "해상생명월(海上生明月)"에서 따왔다.
전시관 안 관람객은 드물고 보안 요원들만 텅 빈 너른 공간을 지키고 있어 썰렁한 느낌마저 든다. 슬쩍 말을 걸어보니 코로나19의 영향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기실 푸동 지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여 중위험 지구로 지정되었다가 지난주 화요일 0시부로 해제되었었다. 어디에서 확진자가 한 명이라도 발생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방역 관계자들이 한밤중에도 가가호호 방문하여 문을 두드리며 발생지 부근에 다녀온 일이 있냐고 확인을 하곤 했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도 있듯이 만사에 조심하는 것이 최선일 터인데, 이럴 때 이곳을 찾는 것이 무모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찌 생각하면 이런 때가 미술품 관람에 적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항상 그렇진 않았지만 한참만에 도착한 출근길 만원 버스 한 대를 그냥 보내고 난 후 곧이어 도착한 다음 버스엔 빈 좌석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
'춘강추조 후래인(春江推潮后来人)'이라는 주제의 전시실에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약한 작가 17명의 작품들이 관객들을 맞이한다.
탕윈(唐云, 1910-93) 작가의 '파초(芭草)', '하화(荷花)' 등 수묵화 작품은 필치가 무겁고 두텁고 굵직하다.
시에즈리우(谢稚柳)의 채색도는 필치가 우아하고 세련되며 모네의 파스텔화처럼 인상파 화가풍의 몽환적 색감 터치가 인상적이다.
우칭시아(吴青霞)의 물고기 채색 수묵화는 전통 흑백 수묵화에 채색을 입혀 한층 생동감이 느껴진다.
관리앙(关良)의 '무송 타호(武松打虎)', '별희(别姬)' 등 중국의 고전이나 희극 속 인물들을 그린 7-80년대 민화풍 작품들은 유치한 듯 독특함을 표출하고 있어 은근히 웃음을 자아낸다. 주먹으로 호랑이를 내리치는 무송의 얼굴이 너무 무표정하고 두들겨 맞는 호랑이도 고양이처럼 온순해 보여 서로 생사를 다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무송이 한 쪽 다리로 호랑이 등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 정적인 그림에 약간의 변화를 주고 있다.
쿤밍 출신 런휘이인(任徽音, 1918-94) 작가의 32*34cm 유화 소품 '복건 숭안현(福建 崇安县)'이라는 작품은 주택들 사이에 좁은 운하가 있는 그림 속 무채색 숭안현에 대해 궁금증을 일게 한다.
시아양(夏阳)의 '상승적인군(上升的人群)', '회화 64II' 등 작품들은 작품 이름처럼 내용도 추상적이라 작가의 의도를 읽어 내기가 결코 쉽지 않아 지레짐작을 할 뿐이다.
천청보(陈澄波, 1895-1947)의 일상 속 평범한 여인의 육체와 표정을 캔버스에 진솔하게 담아낸 '앉아 있는 나녀(坐姿裸女 素描)', '피곤한 나녀(裸女疲倦)' 등 유화는 그림 속 여인의 평소 고단한 삶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쉬쾅(徐匡, 1938-)의 1979년작 '나목 호반'이라는 목판화는 소수민족 여인의 전통복장, 초목과 들꽃, 호수, 수면에 비친 송전탑과 새 등 정교하기 그지없어 한참 동안 눈길을 사로잡는다. 활짝 웃고 있는 촌로의 모습을 목판에 새겨서 찍어낸 62*86cm 대형 판화는 살아있는 듯한 생생한 표정이 나무에 새겨서 찍어 낸 그림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하기 그지없다. 작가가 작품에 쏟아부었을 인내와 집요함과 시간을 가히 짐작할 수가 없다.
양커양(楊可扬, 1914-2010) 등의 작품은 상하이의 모습을 담은 풍경화 소품들이고, 사오커핑(邵克萍, 1916-2010)의 1947년 목판화 '침략의 죄증', '상하이 거리에서(上海马路上)', '거리(街头)' 등은 일제 침략기의 암울했던 현실을 증언하고 있다.
그에 반해 루멍(呂蒙, 1915-96)의 1961년작 '닝보 위에후(宁波月湖)' 등 채색 중국화들은 하나같이 밝고 가볍고 산뜻한 인상을 풍긴다.
제4장 전시관 출구 부근에 양한(楊涵, 1920-2014)의 1946년작 '군민일가(军民一家)'와 1982년 7월 작 '고백(古柏)' 판화가 나란히 걸려 있다. '고백'이란 작품 속 고목의 깊게 파이고 뒤틀린 줄기와 앙상하고 비틀어진 가지와 그 끝 무성한 솔잎은 세월과 풍파에도 결코 꺾이지 않는 기개가 서려있다. 이 작가가 추사의 '세한도'를 본 적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12층으로 올라가서 관람을 이어갔다. 장꾸이밍(张桂铭, 1939-2014)의 1998년작 '하당(夏塘)'은 수묵으로 점과 선을 그리고 선과 선이 만들어 내는 공간을 채색으로 채운 추상화인데, '중국화'로 분류하고 있어 그 영역을 어떻게 가르고 있는지 궁금증이 인다.
바이두 백과(百度百科)는 중국화(中國畵, 간칭 '國畵')를 "붓을 물, 먹, 물감에 찍어서 비단이나 종이에 그리는 중국 전통 회화 형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더 자세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중국화의 공구와 재료는 붓, 먹, 국화 안료, 화선지, 비단 등이며, 소재는 크게 인물, 산수, 화조로 나눌 수 있다. 미술사적으로 민국(民國, 1912-1949) 이전의 것을 모두 고화(古畵)라고 통칭한다.
국화는 예전에는 일반적으로 단청(丹青)이라 불리며 세계 미술 분야에서 독특한 체계를 이루었다. 중국화는 내용과 예술 창작에 있어 자연, 사회 및 이와 관련된 정치, 철학, 종교, 도덕, 문예 등에 대한 옛사람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거문고와 바둑, 글씨, 서예(書法)와 함께 사예(四藝)의 하나이다.
_바이두 백과(百度百科)
'백사전(白蛇傳)'과 '설야(雪夜)'라는 작품으로 아래층에서 만났던 관리앙(关良)과 양함(杨函)의 중국화와 목판화를 다시 만나니 익숙한 친구들을 만난 듯 반갑다.
왕윈허(王云鹤, 1939-)의 1995년작 '춘(春)'은 1995년의 봄이 저렇게 눈부시고 아름답도록 생기발랄하였던가, 하고 잠시 잠깐 그즈음의 내 젊은 날을 돌아보게끔 한다.
우창지앙(吴长江, 1954-)의 '칭하이 대초원(青海大草原)', 빙원의 '고원 풍경도(高原丰庆图)' 등은 중국 소수민족과 그들이 사는 먼 변방의 풍경을 단순하고 꾸밈없이 잘 포착해 내고 있다.
다시 만난 왕윈허 작가, 그는 1997년작 '하청유일(河清有日)'에서 또 한 번 남색에서 나왔다는 청색보다 더 청초한 푸른빛 색의 향연을 화폭 가득 펼쳐 놓았다.
양윈팅(梁云庭)의 벽돌 가옥들 사이로 난 좁고 깊은 골목을 그린 유화 작품 '상하이 농당계열(弄堂系列)' 앞에 서니 전형적인 상하이의 옛 골목길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하다. 인적 없는 그림 속 그 골목을 나서듯 전시실을 나섰다.
12층에는 마침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특별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는데, 무료인 다른 전시실과 달리 이 전시실은 입장료가 20위안이다.
'청명상하도'는 북송(北宋) 때의 화가인 장택단(張擇端)이 그린 너비 24.8cm, 길이 528.7cm의 두루마리 그림으로 청명절(淸明節) 날 인파로 흥청거리는 도성의 모습을 놀랍도록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현재 북경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중국 국보급 문화재이다.
전시실로 들어서자 일렁이는 수로 건너편 기다란 벽면을 스크린 삼아 천여 년 전 북송 번화한 거리의 낮과 밤 풍경과 수많은 인물들의 대형 영상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다. '청명상하도'를 사실적이고도 생생하게 재현해 놓아 그 속으로 빠져들 것만 같다.
가마꾼, 지게꾼, 우마차, 아이와 노는 여인, 행상인, 말 잔등에 귀부인을 태우고 가는 마부, 나룻배, 손님들로 왁자지껄한 주점, 즐비하게 늘어선 노점, 뱃노래에 맞춰 노 젓는 배꾼, 일렁이는 물결 위에 어른거리는 보름달, 홍등을 밝힌 저잣거리, 손놀림이 분주한 목공, 거리에서 뛰노는 아이들, 등짐을 실은 낙타 행렬, 옆구리에 칼을 찬 순라꾼 행렬,... 특별 전시관을 빠져나오니 과거 여행에서 돌아온 타임머신에서 내린 것만 같다.
허공에 뜬 출렁다리 인양 투명한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아찔한 바깥 풍경을 내려다보면서 비스듬히 경사진 장랑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벽면은 국내와 화가들의 유화 소품과 소묘 몇 점이 걸려 있다. 모퉁이 카페를 지나니 아이들 작품들과 애니메이션 동화 스크린 등이 벽면을 빼곡히 채운 복도가 길게 이어졌다.
그 아래층 전시실에 판화 거장 황영옥(黄英玉, 1924-)의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의 작품 한 점 한 점에서는 목판이라는 특유의 도구로써 그 어느 장르의 그림에서도 표출해 내지 못하는 인물과 사물의 내면까지 담아낸 강렬한 매력과 예술가의 고집과 집요함이 엿보인다.
관람객이라곤 한두 명씩만 눈에 띄는 1층 여러 전시실에는 당대 화가들의 유화, 수묵화, 목판화, 동화 등 다양한 장르의 방대한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다. 위층 전시실에서 만난 작품들을 느긋하게 반추하여 곱씹으며 맛을 음미해 보기도 전에 산해진미가 가득한 또 다른 밥상을 눈앞에 마주한 기분이다.
《2021 Shanghai Design 10×10 Global Invitation Poster Exhibision》전시장에서는 각종 기발한 도안의 포스터들이 지나온 세기 상하이의 주요 이슈들과 일상의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출구를 나서기 전에 눈에 들어온《한중 서예교류전(中韩书法交流展), 2021.11.30~2022.1.30》전시장도 반갑기 그지없다. 주상하이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상하이시 서예가협회(书法家协会)와 함께 기획하여 마련한 전시장이다. 수십 점에 달하는 한중 양국 대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둘러보는 호사까지 누릴 줄은 예상치도 못했었다.
"이번 전시회의 원만한 성공을 기원하며, 한중 양국의 우정이 영원하길 바란다."는 전시장 입구의 전언(前言)처럼, 양국이 오랫동안 공유해온 서예라는 독특한 예술문화 교류를 통해 한중간 우호가 더욱 증진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출구로 향했다.
출구 쪽 통로 한편에 예수, 석가모니, 마호메트, 소크라테스, 공자와 더불어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대형 마르크스 조상(彫像)이 새삼 이곳이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 체제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일깨워 준다.
미술관을 뒤로하고 거리로 나섰다. 한기가 으슬으슬 뼛속으로 스며든다는 상하이의 겨울, 상하이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겨울의 한낮 거리의 바람이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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