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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족(백족; 白族)의 나라 남조(南詔)의 고도 따리(大理)

라오짱(老張) 2024. 8. 29. 13:20

숭성사(崇聖寺)와 고성(古城)

낯선 분위기에 아랑곳없는 듯 피곤한 몸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몇몇 곳에서 거절을 당한 뒤 겨우 예약을 한 리(大理) 기차역 인근 숙소는 붉은색 하트 무늬로 도배된 '러브호텔' 냄새가 물씬 풍겨 일면 정신이 사나웠었다.

컵라면으로 아침을 들고 9시가 조금 지나 삼탑(三塔)이 있는 숭성사(崇寺)로 향했다. 삼탑 전선(三塔傳線) 버스는 출근 시간이 지나서인지 그리 붐비지 않는다. 한 무리의 할머니들이 차에 오르자 조용하던 버스 안이 갑자기 새들이 지저귀는 숲 속에 든 것처럼 수다 소리로 가득하다.

시얼허(西河) 위로 놓인 씽성대교(盛大)를 지나는 버스 오른쪽 차창 밖으로 얼하이(洱海)가 펼쳐져 있고, 도로변에는 가지마다 붉은 꽃이 무성한 백일홍 가로수가 도열해 있다.

공작이 꼬리 날개를 펼친 듯 도로 아래에서 얼하이까지 기와지붕 가옥들이 빼곡히 들어선 마을이 넓게 펼쳐져 있다. 30여 분만에 리장 고성의 성벽이 오른쪽 도로변에 나타나고, 10여 분을 더 달리니 숭성사(崇寺) 삼탑 정류장에 도착했다.

문표를 끊어 경내로 들어섰다. 계단 위 뭉게구름을 인 웅장한 짙푸른 창산(山)의 마룡(馬龍) 옥국(玉局) 용천(龍泉) 소잠(小岑) 응락(應樂) 설인(雪人) 등 준봉들을 뒤로하고 양쪽에 10층 탑 하나씩을 거느린 16층 주탑이 구름에 닿을듯 하늘 높이 치솟아 있다.

'문필탑(文塔)'이라고도 불리는 대탑은 높이 69.13m 바닥 9.9m로 남조(南, 738-902년) 때인 833-840년 사이에 세워진 전형적인 따리 지역 특색을 지닌 밀 처마식 공심형 사각 전탑(密檐式空心四方形塔)이라고 한다. 양 옆 남북의 10층 소탑은 모두 높이 42.17m로 따리국(大理国) 단정(段正, 1108~1172) 시기에 건립된 팔각형 밀 처마 공심전탑이다. 가히 따리 지역을 대표할 만한 상징물이자 위대한 유물이라는 감탄을 자아낸다.

남조 건극 12년(871)에 만들었다 소실된 것을 1997년 다시 만들었다는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종, 건극 대종(建極大) 종루를 지나 관음전 경내로 들었다. 우동(雨銅)관음전에는 왼손에 커다란 보병을 들고 오른손을 가슴께에 든 관음상이 정중앙에 자리하고 수월, 아차야, 부석, 범증 등 각기 다른 이름의 관음상들이 그 둘레에 호위하듯 자리하고 있다.

관음전 뒷문으로 나서니 '숭성사(崇圣寺)'와 '불도(佛都)'라는 현판이 걸린 산문이 넓고 가파른 계단 위에 금빛 기와지붕을 이고 위엄스레 자리하고 있다.

신기루인 듯 원만한 봉우리 위에 피어 올라 머무르는 구름을 쫓기라도 하듯 비스듬한 사면을 따라 사원 깊숙이 접어들었다. 하늘색 캔버스에 그려 놓은 듯 미동도 않고 몽글몽글 피어 올라 있는 구름이 그림 속 한 폭 풍경 같다. 어떤 이는 산문을 배경으로 합장을 하고 어떤 이는 매점 그늘에 앉아 하염없이 그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기도 한다.

경사진 산기슭을 따라 층층이 자리한 천왕전 사천왕전 미륵전 등을 차례로 훑어보며 사찰의 스케일에 한 번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대웅보전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벽을 따라 둘러앉은 갖가지 이름의 천태만상 존자들의 깨달음을 얻은 희열을 머금은 표정은 가히 조각가 장인의 상상력은 무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홉 마리 용이 내뿜는 물줄기가 어린 옥불을 씻기는 구룡 욕지를 앞뜰 삼아 남자 몸에 여성 얼굴을 가졌다는 바이족(白族) 밀종의 주존인  아차야(阿嵯耶) 관음을 모신 전각 안으로 들었다. 안내문은 아차야 관음이 허리 가는 관세음, 대리 관세음, 운남 복성(云南福星) 등으로도 불린다고 설명하고 있다.

관음전 내부 계단을 따라 전각 바깥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에 올라섰다. 파란 하늘 아래 다리 고성(大理古城)과 그 너머로 펼쳐져 있는 얼하이(洱海) 등 형용하기 힘든 파노라마 앞에 한동안 말을 잊고 생각을 잊고 나 자신마저 잊을 지경에 빠져들었다.

관음전 뒤 능선 위 아득히 멀리 자리한 망해루(望海楼)로 올라갈 생각을 접고 걸음을 되돌려 거쳐왔던 전각들을 거슬러 내려갔다. 동문 입구에는 흰색 바탕 붉은색 꽃무늬가 의복에 붉은색 조끼를 입은 바이족 여성 가이드들이 수다로 무료함을 달래며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정오가 지나서 숭성사를 빠져나와 버스를 타고 고성 북문 쪽으로 이동했다. 북문 건너편 삼석가(三石街) 입구 식당 야외 탁자에 앉아 다오샤오미엔(刀削面) 등으로 허기를 달랬다. 뜨겁지만 시원한 국물이 좋고 청량한 기온에 바람까지 불어 이마에 땀이 솟을 틈도 없다.

따리 고성은 "물이 창산을 두르고 창산은 고성을 품었다(一水绕苍山 苍山抱古城)"는 표현이 말해주듯 얼하이(洱海)와 창산 사이 너른 대지 위에 평온하게 자리하고 있다.

남조국 왕 이모심(异牟寻)이 779 년 천도해서 세운 양쥐메이청(羊苴咩城)을 기초로 명나라 초에 재건된 현존 따리 고성은 네모난 모양으로 4개의 문을 두고 남북 3줄기 계수(溪水)를 천연 장벽으로 이용했으며, 성안 남북으로 5개 거리와 동서로 8개의 골목을 뚫어 도시 전체를 바둑판식으로 배치하여 전형적인 계획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바이족(白族)의 신앙 민속 날염 직조 목각 석각 차마고도 투어차(沱茶) 등을 사진과 소품 등으로 소개하고 있는 자그마한 따리 비물질 문화유산 박물관은 바이족 민속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우리의 옛 시골마을 입구마다 한 그루씩  서있던 아름드리 느티나무처럼 가지를 사방으로 넓게 늘어뜨린 느티나무를 둘러싼 벤치 한편에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앉아 있던 바이족 소녀와 잠시 얘기를 주고받았다.

아담한 규모의 위얼위엔(玉洱园) 공원은 노인들만의 세계다. 공원 정자나 벤치에 끼리끼리 무리 지어 모인 노인들은 카드나 마작 놀이를 하고 벤치에 앉아 담소하고 가무를 즐기는 등 그들이 지나쳐 온 세월만큼이나 느리게 그렇지만 순간처럼 지나가버릴 한낮 시간의 호수에 몸을 맡기고 있다.

장신구 장식품 등 공예품 판매상이 돌로 포장된 보도 위에 늘어서 있는 양인가(洋人街) 초입으로 들어서서 길게 이어지는 소점포 거리를 따라 남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중국 웬만큼 알려진 고도(古都)에는 하나씩 있지만 이곳에서 문묘를 만난 것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곳 문묘는 명나라 초기에 처음 세워졌으며 2014년 대대적으로 중건되었다고 하니 고개가 끄떡여진다.

문묘로 슬쩍 발을 들여서 대성전(大成殿) 안을 훑어보았다. <맹자(孟子)> 만장(万章) 하편에 따르면, 음악에 있어 금석사죽포토혁목(金石丝竹匏土革木) 여덟 가지 소성(小成)을 하나로 모아 대성(大成)을 이루어 낸 것처럼, 공자는 여러 성인의 덕을 하나로 모아서 일대 성인(一大圣人)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평했다.

공자를 중심으로 좌측에 증자 맹자 염경 재여 염구 언안 손사 주자, 우측에 안회 자사 민손 염옹 단목사 중유 복상 유약 등 제자들의 등신상이 자리하고 있다. 만세 사표로 추앙받는 공자를 비롯한 제자들의 조상군(彫像群)에는 각자의 개성과 함께  위엄과 기상이 엿보인다.

따라 고성 남쪽의 오화문(五华门)를 지나고 누각 높이 '문헌명방(文献名邦)'이라는 편액이 걸린 남문으로 빠져나왔다. 남문 위 '따리(大理)'라는 금빛 글씨는 당시 전인대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이던 궈모뤄(郭沐若, 1892~1978)가 1961년 인도네시아와 인도를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에 따리에 들러 남긴 글귀 중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남문 밖에서 한참 동안 고성 쪽으로 돌아보며 아쉬움을 거두지 못하는 마음을 다독이며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에서 짐을 챙긴 후 기차역으로 향했다. 18:32 따리 발 쿤밍행 열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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