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두(成都)에서의 이튿날이다. 5시쯤 달콤한 잠에서 깨어 서둘러 세수를 하고 배낭을 집어 들고 호텔을 나섰다. 오늘의 행선지는 청두에서 남쪽으로 120km여 떨어져 있는 아미산과 그 옆 낙산대불이다. 택시를 불러 청두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모두 네 개가 있다는 기차역 중 남역으로 향했다.
어제 진리(金里)를 둘러본 후 10호선 지하철 연장 공사가 한창인 도로를 따라 늘어선 여행사 사무실 여러 곳을 들러서 물어보았지만, 하나같이 정부 시책에 따라 외국인 투어객은 받질 않는다는 대답만 돌아왔었다. 일일 패키지 투어가 여러 면에서 편하겠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직접 다녀오는 수밖엔 도리가 없어, 청두 남역-아미산 구간 기차표와 낙산-청두 구간 기차표를 각각 예매해 두었었다.
5:40경 남역에 도착하니 너른 역 광장은 썰렁한데 역사 입구에는 벌써부터 젠캉마(健康码)를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첫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1층 대합실 의자는 빈 좌석이 없이 만원이고 늦은 시각의 열차를 탑승하는 2층은 텅 빈 듯 한산하다.
어제 청두 도착 후 치른 갖가지 고초들은 배낭을 메고 가는 자유여행에서 예사롭게 겪을 수 있는 일들 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어떤 예기치 못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자못 긴장을 하면서 천축국으로 경전을 구하러 떠나는 구법승처럼 06:39발 아미(峨眉) 행 열차에 올랐다.
고속열차가 정차하는 아미산역까지 가는 열차표는 이미 매진이라 할 수 없이 조금 더 떨어진 아미 역으로 가는 잉워(硬卧) 열차표를 예매했었다. 잉워는 침대 열차라서 고속열차보다 차표가 비싸지만 속도는 절반 정도로 느리다.
침대 열차는 한 쪽면 차창 아래 접이식 간이 의자가 놓였고, 반대편엔 가로로 3층 침대 두 개가 마주 보며 놓인 구조이다. 내 좌석은 '硬卧 05车 02号 中鋪'로 "딱딱한 침대열차 5호차 2번 좌석 2층 침대칸"이다. 통로의 의자에 앉아 있다가 2층으로 올라가서 몸을 누이고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풍경을 한참 동안 바라다보았다. 느릿한 완행열차는 차창 밖으로 비에 젖은 듯 차분히 가라앉은 녹음 무성한 대륙의 풍경을 펼쳐 보인다.
눈을 떴다가 감았다가 비몽사몽 뒤척이다가 출발 한 지 두 시간이 가까워질 즈음 몸을 일으켜 보니 아미 북역(峨眉北站)이다. 채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지만 마치 온밤을 자고 일어난 듯 한 기분이다. 지척인 아미 역에 정차한 열차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아미산 셔틀버스 정거장으로 갔다.
몇몇 질문에 둑 터진 봇물처럼 말을 쏟아내는 택시 기사는 청두 사투리는 여자가 하면 듣기에 좋고 이웃 도시 중칭의 사투리는 남자가 해야 듣기에 좋다고 한다. 전세 버스를 이용하는 패키지 투어객이 대부분이라서 그런지 아미산여객센터(旅遊客运中心)는 비교적 한산하다.
젠캉마 확인을 하고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서 아미산 정상부 금정(金顶) 바로 아래까지 케이블카가 연결되는 레이통핑(雷洞坪)까지의 차편과 케이블카 탑승권 등이 포함된 370위엔 짜리 왕복표를 샀다. 보국사와 복호사 등은 터미널에서 지척 거리에 있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아 아쉬울 뿐이다.
9시경 우리를 포함한 관람객 6명이 7인승 미니 버스에 올랐다. 산 언저리 마을을 지나는가 싶더니 금세 산자락 좁은 산길이 시작되고 금정까지 50여 km라고 알리는 표지판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난다. 아미산 오른편 가장자리 계곡과 산줄기를 끼고 시곗바늘 반대 방향으로 크게 휘돌며 고도를 높여갔다. 꼬리에 꼬리를 문 차량 행열이 오르내 리는 왕복 2차선 도로에서 더러 아찔하게 앞지르기를 하는 성질 급한 운전자들이 있어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한 시간 여만인 10시 10분쯤 고도 1300여 미터 매점 두어 개와 화장실이 있는 마을에서 10여 분간 휴식을 했다. 선선한 공기가 높은 고도에 와 있음을 알린다. 산정에서 간식 겸 허기를 채우려고 쫑즈를 두어 개 샀는데, 기사 양반이 마침 오늘이 쫑즈를 먹는 풍습이 있는 단오절 연휴의 첫날이라고 상기시켜 준다.
산 동쪽과 북쪽 기슭을 휘돌며 고도를 높여 가던 길이 서단에서 게이트를 통과한 후 남단으로 들어서서 지그재그를 반복하며 뇌봉평으로 향한다. 고도 2천 미터가 넘어서면서 귀가 먹먹해지고 길 옆 푸른 수목 너머는 스멀스멀 세력을 펼친 운해에 잠겨 절해고도의 벼랑길을 달리는 느낌이다.
해발 2,370여 미터 뇌동평(雷洞坪)에서 셔틀 차량에서 내렸다. 케이블카 역까지 놓인 좁은 계단길을 가득 메운 사람들 틈에 끼어서 20여 분 거리의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발을 옮긴다. 가끔씩 가마꾼 두 명이 앞뒤에서 어깨에 멘 가마에 탄 사람도 눈에 띈다.
길옆 군데군데 간식거리 지팡이 기념품 등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한 곳에서 큼지막한 고구마 하나를 사서 배낭에 챙겨 넣었다. 중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서 길 옆 나무 위를 쳐다보고 있다. 지나는 사람들이 행여 먹이를 던져주지 않을까 하고 모여든 아미산에 서식한다는 원숭이들이다. 코앞 발치에서 야생의 원숭이를 대하니 특별한 느낌이 들고 한편으론 멸종위기에 처해 야성마저 잃어버린 듯 보여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도 들었다.
해발 2500여 미터 케이블카 정거장에 올라서니 11시가 되었다. 발 디딜 틈 없이 승객을 빼곡히 태운 101명이 탑승할 수 있다는 아시아 최대 규모 독일산 케이블카가 채 10분도 안되어 금정(金頂, 3,077m)으로 오르는 길목 입구에 닿았다. 아미산은 서기 1세기경 중국 최초 불교 사찰이 이 산 정상 부근에 세워진 후 연이어 많은 사찰들이 들어섰고, 보현보살의 도량으로 오대산 구화산 보타산과 더불어 불교 4대 성지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계단을 올라 '화장세계(華藏世界)'라는 편액이 걸린 산문으로 들어서고 계단을 조금 더 오르니, 짙은 안개구름 사이로 해발 3077m 아미산 금정 주봉에 자리한 화장사가 감춰 놓은 불계(佛界)를 조금씩 펼쳐 보인다. 본당으로 오르는 높고 드넓은 계단 아래 너른 공간에 놓인 여러 개 초대형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연이 걷혔다 가렸다 변화무쌍한 안개와 섞여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미산불교협회가 1970년 화장사 앞에 세운 쓰촨 방송국 송신탑을 철거한 자리에 2005년 말 완공했다는 높이 48미터 열 군데 방향을 향해 열 개의 얼굴을 가진 '시방 보현(十方普贤)'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보현보살은 여래의 중생 제도를 돕고 중생들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지녀 '연명 보살(延命菩薩)'로도 불린다고 한다.
온통 금빛으로 눈이 부신 원형 기단과 네 마리 코끼리 그리고 그 위에 앉아 있는 자비로운 보현보살이 바람 따라 흐르는 안개에 모습을 보였다가 감추기를 반복한다. 대웅보전을 둘러보고 옆 계단으로 솜처럼 하얀 구름이 가득한 천 길 낭떠러지 절벽을 끼고 있는 해발 3077미터 금정(金顶)에 오르니 찬란한 금빛 금전(金殿)이 맞이한다.
보드라운 비단옷 마냥 금빛 시방 보현보살을 감싸며 흐르는 안개와 짙은 향연을 뒤로하고 한발 한발 계단을 내려선다. 범종 소리가 안갯속에 은은히 울려 퍼지고, 보현보살이 언뜻언뜻 푸른 하늘과 함께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어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하고 발길을 더디게 붙잡는다. 5~6인승 소형 케이블카를 타고 레이통핑까지 바닷속으로 잠수하듯 안갯속 500여 미터를 빠른 속도로 내려왔다.
......
아미산역에서 16:16에 고속열차에 올라 15분 만에 낙산 역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시간을 다투어 러산시(樂山市)의 민강(岷江) 대도하(大渡河) 청의강(靑衣江) 등 세 강이 만나는 곳 절벽에 조성된 높이 71미터의 세계 최대 마애 미륵불인 낙산대불(乐山大佛)로 달려갔다.
기차역에서 10km여 거리로 멀지는 않지만 민강 1교 부근에서 정체가 심하여 마음에 조급증이 일었다. 언제나 시간과의 씨름은 힘겹다. 청두로 돌아가는 기차 시각을 50여 분 늦춰 시간을 조금 확보하니 마음이 조금 느긋해진다.
낙산대불은 당나라 때인 713년 링윈쓰(凌云寺)의 해통(海通) 스님이 선박의 안전 운항을 기원하기 위하여 세 갈래 강이 합쳐지는 급한 물살을 굽어보는 곳 절벽에 미륵불 조성을 시작하여 90년 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한껏 뒤로 젖혀 미륵불을 올려다 보고 더러는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몇 번씩 깊이 숙이기도 한다. 이 미륵불은 천 삼백 년이 넘도록 변함없는 모습으로 이 자리를 지키며 난간 아래 급하게 흐르는 물살을 굽어보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인생도 한낱 저 강물처럼 어디론가 바삐 휩쓸려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측 절벽으로 난 구곡잔도(九曲棧道) 계단을 올라 대불 뒤쪽 링윈쓰(凌云寺) 경내를 한 번 훌쩍 둘러보고 산문을 빠져나왔다. 경도가 10도 이상 차이가 나는 상해와 시각은 같지만 실제는 1시간 정도 늦어 일몰까지는 시간이 여유롭다.
러샨(乐山) 시내로 나와서 택시 기사가 일러준 러샨 대표 음식인 챠오쟈오뉘러우(跷脚牛肉)를 맛보기 하고 로샨 역에서 멀지 않은 식당에 들어갔다. 얇게 쓴 여러 부위 우육을 육수에 담아 내놓는 챠오쟈오러우를 고춧가루에 찍어 간을 맞추어 먹는 맛이 특별하다. 10:45경 청두 동역에 도착해서 11시에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하루의 여정을 되돌아보니 붉고 짙고 뜨거운 마라탕에 살짝 담갔다가 꺼내 먹는 훠궈처럼 아미산과 낙산대불 자비의 세계에 발만 살짝 디뎠다가 빠져나온 듯 짙은 아쉬움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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