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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국모 쑹칭링(송경령; 宋庆龄)

라오짱(老張) 2024. 8. 22. 09:50

 
찬란한 상하이의 봄이 머지 않았다. 집에서 지척 거리인 쑹칭링 릉원(陵園)을 찾았다. 경비원이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코로나19 음성 확인 큐알코드인 '젠캉마(健康码) 검사 등 아무런 절차도 없이 입구를 들어섰다.
 
상하이시 만국공묘이던 이곳은 1984년 쑹칭링 능원으로 변경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곳엔 쑹칭링과 그녀의 부모를 모신 송 씨 묘원, 외적인(外籍人) 묘원, 명인 묘원 등 묘역과 함께, 쑹칭링 기념관, 상하이 아동박물관 등이 들어서 있다.
 
입구에서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외적인 묘원, 송 씨 묘원, 명인 묘원 순서로 둘러보기로 했다. 외적인 묘원은 1970년대 외무부 지시로 건립되었으며 중국에 큰 공헌을 한 외국 저명인사 640여 명이 잠들어 있다.
 
안쪽 가장자리에 서있는 비석 하나가 지금은 루쉬공원에서 영면하고 있는 루쉰도 1936-1956년 동안 이곳에 묻혔었다고 말해 준다. 옛 훙커우공원이던 루쉰공원에는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인 매헌이 자리한 곳이기도 하다.
 
한국인 몇몇도 이곳에 묻혀있다가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김인전' 선생은 1993년 8월 5일 대한민국으로 이장했다는 표지석이 묘비명을 대신해서 옛 묘터를 지키고 있다. 입구 쪽에 순 한글로만 씌어진 "애녀 조금보 지묘"라는  묘지석이 무슨 사유로 한국인인 그녀가 여기에 잠들어 있는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외국인 묘원 서편에 쑹칭링의 묘역이 홍챠오로(虹桥路)를 등지고 남향으로 자리한다. 그녀 묘역 후면과 좌우를 진녹색 수목이 둘러서 있고, 양쪽 가장자리에 각각 한 그루씩 라일락이 꽃을 활짝 피웠는데 향기가 그윽하다.
 
흰색 석재 무덤 위에 붉은색 '중화인민공화국 명예주석'이라는 글귀와 함께 생몰 일자를 적은 쑹칭링(1893.1.27-1981.5.29) 여사의 묘지가 자리하고 있다. 묘역에는 그녀 부모 내외와 자신을 돌보아주던 친구 이연아(李燕娥)도 함께 잠들어 있다.
 
쑹칭링(宋庆龄, 1893-1981)은 중국 혁명가로 삼민주의를 제창한 쑨원(孙文, 1866-1925년)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였던 쑹자수(宋嘉树, 본명 韓敎準, 1864-1918)의 딸로 1893년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20세 때인 1913년부터 쑨원의 비서로서 <건국방략(建国方略)> 등 강령과 전문, 선언문 등 쑨원이 지은 각종 문성의 초안에 참여하는 등 혁명의 동반자이자 조력자가 되었다고 한다. 
 
하이난 원창(文昌) 출신의 중화민국 재력가로 쑨원의 혁명에 재력지원을 아끼지 않은 쑹자수는 3남 3녀를 두었다고 한다. 첫째가 쑹아이링(宋霭龄, 1889-1973)으로 미국 유학 후 사업가와 결혼하였고, 토지혁명 때는 장제스의 공산당 토벌을 지지했다고 한다.
 
둘째 딸이 곧 쑹칭링(宋庆龄)이고, 셋째 딸은 국민당 총통을 지낸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龄, 1897-2003)이다. 흔히 "첫째는 돈(财), 둘째는 나라(国), 셋째는 권력(权) 각각 사랑했다."는 말이 그녀들의 인생역정을 단적으로 얘기해 주고 있다.

그녀의 묘역에서 나와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명인(名人) 묘원이 자리한다.

 
"세계 절단 이식술의 아버지" 천중웨이(陈中伟1929-2004) 교수, 북양정부의 외교총장 등을 역임한 옌후이칭(颜惠庆,1877-1950), 극작가 수필가 시인으로 공산당원이던 두쉔(杜宣, 1914-2004), 영화예술가였던 쑨다오린(孙道临, 1921-2007)과 월극(越剧) '왕파이(王派)' 창시자 왕원옌줸(王文娟, 1926-2021) 부부, 소화병리학 전문 공정원사 쟝샤오지(江紹基, 1919-1995),
 
샤오싱 출신 저명한 서예가였던 후원수이(胡问遂, 1918-1999), 일본에 유학하고 1907년 <중국신보(中国新报)>를 창간했던 양두(楊度, 1875-1986), 아동 희곡가이자 인재 양성에 힘쓴 런더야오(任德耀, 1919-1998),
 
저장성 진해현(镇海县) 출신 화가로 상하이 인근 수향 저우좡에서 그의 행적을 접했었던 첸이페이(陈逸飞, 1945-2005),  쑤저우 출신 저명한 중국 전통 현악기 연주자로 "쟝티아오(蒋调)" 유파 창시자인 쟝위에촨(蔣月泉, 1917-2001),
 
화이안(淮安) 출신 전국정협 전국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저우쭤민(周作民, 1882-1955), 1935년 280여 명과 함께 '상하이문화인 구국운동 선언'을 발표했던 마샹바이(马相伯, 1840-1939), 중국 희극가협회 부주석을 지냈던 예술대사(大师) 저우신팡(周信芳, 1895-1975), 저명 만화가로 <삼모유랑기(三毛流浪记)> 등을 남긴 장러핑(张乐平, 1910-1992) 등 많은 저명인사들이 잠들어 있다.
 
명인 묘원을 찬찬히 둘러보고 있는데 경비원이 오후 5시면 문을 닫는다고 하며 출문을 보챈다. 입구로 들어선 지 두어 시간이나 지난 것이다. 산 자도 마찬가지이거니와 살다가 간 망자들의 인생의 단편을 알아보는 것도 적지 않은 시간과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예전 이곳에 왔을 때 '쑹칭링 기념관'은 한 번 둘러보았으니 큰 아쉬움은 없다. 들어왔던 정문을 향해 발길을 옮기는데 서편으로 기운 태양이 내 모습을 길게 그림자로 드리운다. 

<쑹칭링 약력>

1893년, 상하이에서 출생
1907년, 14세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13년 조지아 주 웨이스리안 칼리지에서 문학사 학위, 그해 8월에 일본에 도착 겨울에 쑨원의 비서가 됨
 
1915년 10월 25일,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7세 연상의 쑨원과 일본 도쿄에서 결혼, 1916년 5월에 쑨원과 귀국하여 상해에 도착
 
1916년, 쑨원과 함께 일본에서 귀국하여 쑨원의 반제국주의 반봉건 혁명투쟁과 5·운동 지지
 
1918년, 쑨원을 대신하야 러시아 혁명 승리 축하문 등 레닌에게 보낸 다수의 전문 작성, 소련 등과의 국제회담과 제1차 국공합작 등에 참여
 
1921년 5월, 광저우에서 중화민국 비상대총통에 취임한 쑨원에 반대하는 반군이 1922년 총통궁을 포격하자 쑨원을 먼저 피난시키고, 자신은 남아서 반군을 견제
 
1925년 3월, 병사한 쑨원의 유지를 계승하여 신삼민주의를 수호하고 노동자와 농민 대중의 혁명 투쟁을 지지했으며, "5·30 사건 실업노동자 구제회"를 조직하여 실업노동자를 구제하고 반제애국투쟁을 칭송하는 담화 발표
 
*5·30 운동(五卅运动)은 반제 애국운동으로 상하이와 칭다오의 본 방적공장에서 노동자 파업 투쟁에서 발단. 1925.5.15일 상하이 '내외면(内外棉)' 제7공장 일본 자본가가 노동자 구정홍(顾正红)을 총살하는 등 일제와 북양 군벌의 탄압이 심화되자, 5.30일 상하이에서 시위와 파업 등  반제 애국운동 발발한 후 중국공산당 지도하에 노동자계급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산
 
1927년, 장제스가 4·12 쿠데타를 일으키자 마오쩌둥(毛澤東)·둥비우(董必武) 등 공산당원들과 연명하여 신랄하게 비난
 
1927.8.1일, 난창 봉기에서 저우언라이(周同志來) 등 25명으로 구성된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위원으로 추대되었고, 봉기 당일 그녀와 마오쩌둥 등 22명은 쑨원의 유지를 계승하고 "반제국주의와 토지문제 해결을 위해 계속 분투할 것"을 호소하는 국민당 중앙위원 명의 선언문 발표
 
*난창기의(南昌起义)는 1927년 8월 1일  중국 공산당이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국민당 반동파에 대항하여 장시(江西) 성 난창(南昌)에서 일으킨 무장봉기로 저우언라이(周恩来), 허룽(贺龙), 리리싼(李立三), 예팅(叶挺), 주덕(朱德) 등이 주도
 
1936년 6월, 전국 각계 구국 연합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손중산 탄생 70주년 기념행사, 루쉰 장례, '칠군자' 구국투옥 운동 등을 통해 많은 사람이 항일전선에 합류쑹칭링은 제2차 국공합작의 실현과 항일민족통일전선의 형성에 큰 공헌
 
1934년 4월, 중국 공산당 '항일구국 6대 강령' 제시, 쑹칭링 등 '중국 인민 대일작전 기본강령' 발표
 
1937년 2월, 국민당 제5기 3중 전회에서 허상응(何香凝) 등과 '중산선생의 연러, 연공, 부조농공(联俄、联共、扶助农工) 3대 정책안 회복'을 제시하여 국민당의 입장 변화와 항일 단결 촉구
 
1938년 6월, 홍콩에서 '중국수호동맹' 조직 중국의 항전을 세계에 알리고, 전시 의료 구호와 아동 복지사업 실시
 
1944년, 민주연합정부 수립과 항일전쟁 승리 후 평화·민주·단결 방침 아래 평화적 건국을 실현한다는 공산당의 주장 지지
 
1946년 7월 23일, 상하이에서 《연립정부 조직 및 미국 인민에게 미국정부의 국민당 군사지원하도록 제지 촉구 호소 성명》 발표
 
1947.11.12~1948.1.1일 홍콩에서 개최된 국민당 민주파 제1차 합동대표대회에서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민혁)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선출, 그녀를 명예주석으로 추대
 
1949년 9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초청으로 베이징에서 신정협 참가하고,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에 피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국무 활동을 수행, 여성과 아동의 문화·교육·보건·복지 사업에 주력이후 중화전국민주여성연합회 명예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여성연합회 명예주석, 중국 인민보위아동전국위원회 위원장직 역임
 
1950년, '국제평화강화' 스탈린평화상을 수상
1951년, 중국 인민보위아동전국위원회 주석으로 
 
1952년 궈모뤄(沫若等人) 등과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 평화 회의'를 발족,
1954년 9월, 쑹칭링은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에 피선
 
1959년 4월, 제2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에 피선
1965년 1월, 제3차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렸고, 그녀는 다시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피선
 
1975년 1월 제4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에 재선
1978년 2월 제5차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연임
 
1980년 8월,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 회의에서 총회 집행 의장 수임
1981년 5월 15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쑹칭링에게 중화인민공화국 명예주석 칭호 수여
 
1981년 5월 29일 20시 18분에 베이징에서 병사. 유언에 따라 상하이 만국공동묘지 부모 묘역 동쪽에 안장
 
그녀의 일평생 행적을 개략적으로 살펴 보건데, 쑨원이 신중국의 이념적 기초를 세웠다면 그녀는 1925년 세상을 등진 쑨원을 대신하여 그의 사상을 평생 동안 현실화 시킨 장본인임을 알 수 있다. 가히 중화인민공화국을 탄생시킨 국모로서 추대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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