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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 침탈의 전초지 쩐장(镇江)

라오짱(老張) 2024. 9. 19. 14:18

1.

중국에서의 마지막 일요일이다. 아무런 일정을 생각지 않다가 웹 검색 중 쩐장(镇江)에 펄벅(Paerl S. Buck, 1892-1973) 기념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차 편을 검색해서 홍챠오역에서 11:03에 출발하는 쩐장행 기차표를 예매했다.  

 

전쟝(镇江)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 때 거쳐간 곳이자 유비, 손권, 노숙, 태사자 등 삼국지의 영웅들과 왕희지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자취가 어린 곳이기도 하다. 재작년 7월에 쩐장을 찾았을 때는 적벽대전을 앞두고 촉-오 동맹이 맺어진 장소인 베이구산(北古山), 지아오샨(焦山)의 비림(碑林)과 아편전쟁 때 영국 군함을 저지하려던 포대 등을 둘러보았었다.

 

간간이 잠시동안 쏟아붓곤 하는 소낙비를 제외하곤 두어 주일째 맑은 날씨를 보였던 상하이처럼 장강(长江; 창쟝) 상류 쪽으로 차례로 자리한 도시들도 코발트빛 하늘에 솜털처럼 희고 옅은 구름만 드리우고 있다.

 

예정된 시각에 출발한 열차는 만석으로 출발해서 쿤산, 쑤저우, 우시, 창저우를 거치면서 승객 절반 이상을 내려주고 12:35경 쩐장역에 도착했다. 상하이로 돌아가는 18:09발 열차시각을 감안하면 쩐장박물관과 임정청사를 먼저 둘러보고 기차역에서 가까운 펄벅 기념관을 마지막으로 둘러보면 좋을 듯싶다.

 

2.

역에서 택시를 타니 수령 육칠십 년은 되어 보이는 프랑스 오동이 줄지어선 좁은 옛길을 따라 채 10분도 되지 않아 쩐장박물관에 도착했다. 프랑스 오동은 플라타너스와 유사한 수종으로 2미터 정도 높이에서 줄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올라간 모양이 독특하다.

 

장개석(蔣介石, 1887-1975)이 송미령의 환심을 사기 위해 프랑스에서 프랑스 오동 2만여 그루를 공수하여 중화민국 국민정부(1925-1948)의 실질적 수도였던 남경에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기실 난징의 프랑스 오동은 '이구 현령목(二球悬铃木)'으로 1929년 쯔진산(紫金山)에 쑨원의 능묘를 조성하면서 시내 수십 개 주요 도로에 심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 정확한 수종이 무엇이고 누가 무슨 연유로 심었건 이곳 쩐장을 비롯하여 난징, 상하이 등 여러 도시 옛 도심에 남아 있는 프랑스 오동 가로수길은 매우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여름날 강남 특유의 더위를 피해 도망치듯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니 냉동고로 들어선 듯 냉기가 덮쳐온다. 낮은 천정의 중앙홀을 지나 제1부분 전시실로 들어서니 아편전쟁에 관한 역사적 사료들이 맞이한다. 쩐장은 항저우, 쑤저우, 쩐장, 화이안, 지닝, 텐진을 지나 북경에 이르는 경항운하(京杭运河)가 지나는 조운의 길목으로 내륙 수운의 요지였다.

 

전시실의 양쯔강 전역 시의도, 쩐장성 전쟁 영상과 사진 자료, 1842.8.29일 남경조약 체결 등 아편전쟁 관련 전시물을 시계열적 배치하여 관람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곳 쩐장은 제1차 아편전쟁 때에는 난징으로 전진하는 영국군에 맞서 싸운 가장 처절한 전투를 치른 최후의 전장이기도 했다. 제1차 아편전쟁은 청 흠차대신(钦差大臣) 임칙서(林则徐; 1785-1850)의 명으로 광동성 동완의 후먼(虎门)에서 1839.6.3일부터 6.25일까지 영미의 밀수 아편 2만여 상자 1,175톤을 소각한 소위 '호문쇄연(虎门销烟)'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발발했다.

 

1842년의 경항 대운하 조운의 길목을 차단하기 위해 양쯔강을 따라 쩐장으로 진격하는 영국군 군함 76척, 해병 1만 2000여 명에 청군 1,583명이 맞서 싸운 쩐장 보위전(保卫战)에서 청군은 결사항전했으나 결국 채하고 만다.

 

아편전쟁 결과 중국은 영국과 '난징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외국에 토지 할양, 배상, 관세 협상 개시 등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을 심각하게 위협고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전락하게 된다.

 

한편, 제2차 아편전쟁(1856.10-1860.10)은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과 러시아의 지원 하에 중국 시장을 더욱 침탈키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그 결과 중국은 연합군과는 텐진조약과 베이징조약, 러시아와는 아이훈조약을 각각 체결하여 항구 추가 개항, 배상금 지급, 영토 할양 등 침탈을 당하게 된다.

 

쩐장은 1861년 강제 개항되고 영국 조계가 설치되면서 전통적인 항구도시에서 근대 상업 중심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영국 조계지가 중국에 반환되고 중화민국의 성립으로 난징이 그 수도가 되자, 전장은 1928년부터 1949년 2월까지 난징을 대신하여 장쑤성의 성도가 되기도 다.

아편의 생산, 유통, 남용, 그로 인한 가정 파탄 등 그 폐해를 설명하는 영상 앞에는 남녀노소 많은 중국인 관람객들이 모여 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쩐장의 역사 변천도를 비롯해서 명나라 때의 벼루, 청나라 때의 도자 주전자와 찻잔 등 소품들이 구색 맞추기인양 진열되어 있다.

 

제2부문 전시실은 '1861.5.10일 쩐장 부두 열다' 제하로 1851년부터 1927년까지 외침과 내화 등 중국이 겪은 역사의 격랑을 아래와 같 시대별 관련 사진 자료를 더하여 설명하고 있다.

 

1851년 태평천국농민기의, 1853.3.31일 쩐장 진입과 청군과의 격전1856년 톈진조약, 1861.2.23년 영국 조계지 계약 체결1889.2.5일 서양인 건물 방화 사건1927.3.24일 조계 철수

 

영국인 허드(1835-1911)가 1863년 대청해관 총세무사로 임명되어 48년간 연임했다. 1875년 쩐장 해관의 신고서 처리 건수가 한커우(汉口), 지우장(九江), 상하이, 닝보(宁波), 푸저우(福州) 등 타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았는데, 이는 당시 중국 내 최대 무역항으로서의 쩐장의 지위를 말해준다.

 

강제 개방 후 외자 주도의 화상(华商) 진흥과 민족기업의 성장에 관한 사료들을 해관, 항만, 양행(洋行), 우정통신, 마로철로, 서양과의 교후이(交汇), 선교사들의 활동 등 분야별로 진열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중에는 선교사로 활동한 양친과 함께 쩐장으로 건너온 소설 <대지>의 작가 펄벅에 대한 자료도 눈에 띈다.

제3~4 부문 전시실에는 신해혁명과 광복에 이르는 쩐장의 역사와 도시규획, 행정 관서, 원림 녹화, 도로 교량 등 건설 여정,  그리고 교통운수, 은행금융, 상업실업, 통신오락, 과기교육, 문화위생 체육소방, 자선사업 등 장쑤성 정치 중추로서의 발전사를 소개하고 있다.

 

1층으로 난 계단으로 내려서서 항일투쟁 관련 전시자료와 영상과 음향에 맞춰 '영웅찬가' 등을 따라 부를 수 있는 '군가 부르기(唱军歌)' 등 코너도 마련하여 공산주의 사상과 애국심을 고취하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방대한 시기의 역사와 유물을 소개하는 중국 다른 여느 도시의 박물관들과 달리 쩐장박물관은 서구열강과 일제의 침탈과 그로부터 벗어나는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역사를 집중 조명하고 있는 점이 특이했다.

 

박물관과 도로를 사이에 두고 산기슭에 자리한 옛 영국 영사관 건물에는 오나라의 유물 등 쩐장 지역에서 출토된 옛 유물과 예술 작품을 청동기, 도자기, 금은기, 황실 장신구, 공예품, 서화 등 장르별로 구분하여 전시하고 있다.

 

공예품 전시관 전시품 수가 많지는 않지만 죽각, 칠각, 나전, 목각, 자수, 법랑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금, 은, 수정, 옥 등 귀금속과 보석으로 치장된 황실 여인들의 장신구와 의복 등 섬세한 전시품들은 화려함의 극치를 뽐내고 있다. 그 앞에는 전시품 하나하나 가까이서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하는 젊은 여성 관람객들이 많이 몰려있다.

박물관 우측 산기슭의 '중국 옛 나루터 박물관(中国古渡博物馆)'으로 불린다는 서진도(西津渡) 옛 거리로 올랐다. 삼국시기부터 줄곧 중국 남북 교통의 중추 역할을 했던 곳으로 당나라 시기부터의 수많은 유물들이 잘 보존된 가장 큰 규모의 나루터 역사 문화 거리라고 한다.

 

서진도를 뒤로하고 여유롭지 못한 시간이 재촉하는 대로 '대한민국 임정 사료진열관'을 찾아 발길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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