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절 연휴가 오늘 포함 아직 이틀이 남았다. 상하이에는 어제까지 연 이틀 비가 내렸다. 오늘은 햇빛이 나왔지만 제법 바람이 불어 체감온도를 끌어내렸다. 오늘 기온은 최고 4°C, 최저 영하 7°C로 한국에 비하면 한겨울 날씨 치고는 양반인 편이다.
중국인은 이번주까지 연휴를 이어가고 토일 주말에 대체근무를 할 것이다. 기실 고향을 떠나 상하이 등 대도시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춘절 연휴 시작 전에 귀향을 해서 길게는 한 달 동안 가족과 함께 보낸다고도 한다.
집을 나서 오랜만에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15호선 야오홍루(姚虹路)에서 승차해서 러우샨꽌루(娄山关路)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인민광장 역에서 내려 11번 출구로 나섰다. 대중교통의 가장 큰 이점은 핸들을 놓은 두 손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눈을 지긋이 감고 생각에 잠기거나 스마트 폰으로 웹서핑이나 찾아가는 곳에 관한 정보를 검색할 수도 있다.
인민공원과 인민광장이 마주하고 있는 이곳은 상하이박물관을 비롯해서 상하이역사박물관, 상하이대극원, 상하이 시정부 등이 자리하고 있는 도시의 중심이자 전철 세 개 노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지도 앱이 상하이시 역사박물관 옆에 있다고 알려주는 상하이미술관은 찾을 수가 없다. 인터넷을 포함해서 세상에 나도는 진실이라 포장된 온갖 정보 가운데는 명품을 모방해서 잇속을 챙기려는 소위 '짝퉁'처럼 거짓 정보도 수두룩하다. 미술관 찾기를 포기하고 인민공원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인민공원을 찾았던 기억은 햇수로 3년 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원 곳곳에 튤립 등 온갖 화초들과 벚꽃이 만개한 봄날이었다. 공원으로 들어서자 분수대 주변을 단장한 주홍빛 데이지꽃이 맞이한다. 흥미로웠던 모습으로 기억되는 당사자 없는 공개 구혼 시장 '상친지아오(相亲角)'는 예전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되던 모습과는 달리 한산하다.
•여성, 상하이 출신, 86년 2월생, 키 1.63미터, 대졸, 공기업 행정직, 연봉 11만 위안
•인품 좋고 조건이 비슷한 남성, 출신지역 무관
•연락처: 17301719***
•여성, 80년생, 길림 출신, 미혼, 키 1.65미터, 쑤저우대학 석사 졸업, 상하이 호적, 집과 자동차 소유, 무역회사, 수입 좋음, 성격 밝고 마음 착함
•찾는 인연: 대졸 이상, 키 1.7미터 이상, 교양과 책임감 있고 불량한 기호 없는 남자
•아버지 전화: 13159790***
노부나 노모 열댓 명이 절치부심 30대 중반에서 40대를 넘긴 자식들의 짝을 찾아주기 위해 춘절 연휴 벽두부터 공원에 나왔나 보다. 땅바닥 위에 신상명세서가 적힌 종이를 펼쳐 놓고 냉랭한 공기를 아랑곳 않고 간이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인민공원 안에 자리한 당대미술관도 오래전 폐관한 듯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다시 2호선을 타고 두 정거장 떨어진 푸동 루지아주이(陆家嘴) 역에서 내렸다. 출구로 나서니 황푸강 건너편 와이탄 쪽에서 바라보던 고층 건물들이 머리 높이 우뚝 솟아 시선을 압도하며 내려다보고 있다. 그중 대표적 건물이 동방명주(468m), 진마오 타워(金茂大厦; 88층, 420.5m), 세계금융센터(环球金融中心; 101층, 492m), 상하이센터빌딩(上海中心 ;127층, 632m) 등이다.
상하이에 거주한 지 두 해가 다 되어가지만 동방명주 등 고층 빌딩군이 즐비한 푸동의 루지아주이 쪽을 일부러 찾아가 본 적은 없었다. 상하이는 중국 근대 200년 드라마틱한 역사를 축약하고 있는 도시로 현재는 중국 경제발전을 이끄는 선봉장 역할을 맡고 있다. 그 상징적인 지역이 푸동이요, 푸동 중에서도 루지아주이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세계금융센터 빌딩 옆을 지나 상하이센터 빌딩 쪽으로 발을 옮겼다. 상하이 핫스폿 가운데 하나인 '둬윈서원(朵云书院)'이 그 빌딩 52층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빌딩 입구에는 전망대 티켓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줄을 지어 서있다.
건물 정면에서 우측으로 돌아가면 서점용 엘리베이터로 가는 입구가 나오는데, 서점 입장 예약이 사흘 후까지 모두 마감이 된 상태라 발길을 돌릴 수밖에 도리가 없다. 서점 대신 건물 내부라도 둘러볼 겸 또 다른 입구로 들어섰는데, 서점용 엘리베이터로 통하는 통로가 프리패스로 뚫려 있다. 앞문을 닫고 뒷문을 열어둔 셈이니 서점 입장 예약제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으로 운영되고 있는 상황이다.
엘리베이터는 일층에서 지상 239미터 높이 52층 서점까지 채 1분도 걸리지 않는 빠른 속도로 열댓 명 승객을 싣고 연신 오르내린다. 52층 전체가 전망대, 카페, 기념품점 등이 딸린 서점이다. 웬만한 도서관에 못지않은 규모가 서점 이름을 굳이 '서원(书院)'으로 붙인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서점 입구로 들어서니 유리벽 바깥 베란다 너머로 어깨춤을 나란히 한 주변 고층 빌딩들, 그 뒤로 낮은 빌딩들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황푸강이 눈에 들어온다. 세상엔 공짜 점심은 없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이유는 이 빌딩이나 동방명주의 전망대처럼 비싼 관람료 없이 주변을 한눈에 전망해 볼 수 있기 때문일 터이다.
서점 곳곳에 마련된 의자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구매하는 모습은 별로 볼 수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커피 한 잔을 사들고 베란다 전망대로 가기 마련이다. 서점에 딸린 매점에서 커피 등 음료나 다과를 구매한 사람만 전망이 좋은 베란다로 나갈 수 있으니 정작 서점보다 음료매장이 이곳의 주 수입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차(抹茶) 라테 한 잔을 주문하여 알림 벨을 받아 들고 전망대로 들어서니 난간 유리창 쪽은 비집고 들어갈 틈 하나 없이 사람들로 빼곡하다. 어깨너머로 잠시 바깥을 조망하다가 서적 진열실으로 돌아와서 많은 관람객들과 어우러져 느릿느릿 옮겨 다니며 분야별 여러 섹션으로 구획하여 진열해 놓은 수많은 종류의 책들을 들춰보았다.
기실 여태껏 푸동(浦东)의 중심지인 이곳을 찾아볼 생각이 없었던 것은 빌딩 숲, 복잡한 도로망, 밀리는 차량들, 인파 등 언뜻 서울의 강남 도심의 모습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고전, 서양 미술 작품들, 패션 잡지 속 낯익은 얼굴, 영화 관련 책자 등 익숙하거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책들의 숲 속을 한참 동안 탐험하다 보니,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이곳이 철골 콘크리트 빌딩 숲 속에 그나마 숨통을 틔어주고 생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 시간 여 서점 투어를 끝내고 귀가하는 길에 전철이 지나는 예원(豫园)에 들러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많은 인파로 북적이는 전철역과 예원 주변에는 경찰 차량과 안전 요원들이 인파의 이동을 한 방향으로 통제하고 있다. 불과 몇 주 전까지 이어진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통행과 출입 통제가 먼 옛이야기가 되어버린 듯하다.
예원 상가 가장자리를 한 바퀴 휘돌며 노상의 양꼬치 구이도 하나 맛보았다. 인파로 넘치는 대궐 같은 예원 상가 기와집들은 처마꼬리를 잔뜩 치켜든 채 휘황한 불빛 조명에 불타 오르고 있다.
정월 초사흘이 밤으로 접어들 무렵 수줍게 눈웃음 짓는 가냘픈 초승달에게 인사를 건네고 귀로에 오른다.